이 남자 ‘소니의 잡스’ 될 수 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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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히라이 가즈오(51·사진) 일본 소니그룹의 컴퓨터엔터테인먼트 부문 대표는 일요일인 지난 1일 고개를 숙였다. 게임기인 플레이스테이션 고객 7700만 명의 신상정보가 해킹당한 것을 사과하기 위해서였다.

 겉보기에 그의 사과는 부문 대표의 일상적인 비즈니스 활동의 하나일 뿐이었다. 하지만 일본과 미국 언론은 ‘황태자의 사과’라고 평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의 사과하는 모습을 보며 소니제국의 앞날을 점치기까지 했다.

 월스트리트 저널(WSJ)과 블룸버그,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조금씩 표현은 달랐지만 히라이의 최근 두 달처럼 소니제국이 순탄하지 않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그 두 달 새에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소니제국 현 황제인 하워드 스트링어(70)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가 3월 10일 그를 후계자로 반(半)공식화했다. 스트링어는 히라이를 그룹의 달러박스인 소비자 디지털기기 부문의 대표로 삼았다. 이어 “경영권 승계 작업을 곧바로 시작한다”고 선언했다. 누가 보나 히라이를 황태자로 내정한다는 말이었다.

 그날 한 사람은 패배의 쓴잔을 마셔야 했다. 그때까지 소비자 디지털기기 부문을 이끈 요시오카 히로시(57)였다. 요시오카는 방송 카메라 등을 생산하는 부문의 대표로 밀려났다.

 히라이는 요시오카와 경쟁하기 앞서 구타라기 겐(51)과의 경쟁에서도 승리했다. 구타라기는 ‘플레이스테이션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CD 플레이어에 이어 소니제국의 주력 상품 개발을 이끌었다. 소니제국의 구신(舊臣)세력인 기술자들의 대표 주자였다. 마케팅 출신인 히라이는 2006년 11월 말 구타라기가 맡고 있던 플레이스테이션 부문의 사장 자리에 올랐다.

 히라이는 신기술 개발보다 기존 기술의 서비스 확장을 통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일을 더 중시한다. 히라이는 플레이스테이션 사용자들이 유료로 각종 소프트웨어 등을 다운받을 수 있는 네트워크를 활성화시켰다. 애플의 음악파일과 애플리케이션 장터와 비슷한 모델을 채택한 셈이다. 또 히라이는 잡스처럼 프레젠테이션을 활용해 신제품을 소개했다. 이는 튀는 행동을 경계하는 소니의 일본 출신 경영자들과 차별화된 모습이었다. 그가 ‘소니의 스티브 잡스’로 불리는 까닭이다.

 그러나 히라이의 승리감은 하루짜리였다. 그가 후계자로 내정된 다음 날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했다. 소니는 원재료와 부품 조달 차질로 북동부 지역 공장 6곳과 중부 및 남부의 공장 5곳의 생산을 일시 중단했다. 파장이 컸다. 닌텐도에 대항해 야심 차게 준비한 차세대 플레이스테이션 공개가 불투명해졌다. 이 소식이 알려진 지난달 5일 소니 주가는 휘청했다.

 대지진은 천재지변이어서 히라이가 어찌해 볼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후계자 내정 한 달여 만에 발생한 해킹은 질적으로 다른 문제였다. 해커가 침범한 플레이스테이션 네트워크 서비스는 히라이가 주도한 비즈니스 모델이다. “히라이는 이 모델의 성공 덕분에 후계자 자리를 꿰찼다”고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지난달 10일 분석했다. 이런 플레이스테이션 네트워크가 해킹당한 것이다. 히라이로선 최고의 업적이 무너져 내린 셈이다.

 히라이는 2년 뒤인 2013년에 소니그룹 회장 겸 CEO 자리를 넘겨받을 예정이다. 대지진과 해킹 사태를 수습할 만한 시간은 주어진 셈이다. 히라이는 우선 고객들의 신뢰를 되찾아야 한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신용카드 정보까지 해킹당한 게 사실로 드러나면 히라이와 소니는 더 크게 타격받을 수 있다. 게다가 “소니 내부에서 히라이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 수도 있다”고 블룸버그는 1일 보도했다. 그와 소니의 앞길이 모두 비포장도로인 셈이다.

강남규 기자

◆히라이 가즈오=1960년 일본의 부유한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따라 미국과 캐나다 등에서 생활해 영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한다. 그는 84년 일본 국제기독교대학을 졸업한 뒤 곧바로 소니에 입사했다. 주로 미국 등에서 마케팅을 담당했다. 하워드 스트링어가 구조개혁을 단행한 2006년 플레이스테이션 부문 사장에 올랐다. 구조개혁을 거부하는 소니 기술자들의 고집에 시달린 스트링어가 그를 대안으로 선택했다는 게 일반적인 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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