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도전! 창업 스토리 [3] 조중명 크리스탈지노믹스 사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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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크리스탈지노믹스의 연구개발실에서 조중명 사장이 단백질 구조를 나노미터(10억 분의 1m) 수준으로 보여주는 장비인 X레이 3차원 구조 결정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조문규 기자]


“하고 싶은 연구, 마음껏 하려고 창업을 결심했습니다.”

 조중명(63) 크리스탈지노믹스 사장은 11년 전 가시밭길을 선택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조 사장은 서울 풍납동 아산생명과학연구소 내 크리스탈 본사에서 인터뷰하면서 여러 차례 ‘도전정신’을 강조했다. 이 회사는 각종 질환을 일으키는 단백질의 구조를 규명해 최적의 신약을 개발하는 바이오 벤처다. 65명 임직원 중 조 사장 등 23명이 박사, 29명이 석사인 고급 두뇌집단이다.

 조 사장은 1980년대 럭키(현 LG화학)에서 초고속 승진으로 유명했던 인물이다. LG 창업주 가문과 특수관계란 소문이 돌 정도였다. 그럴 만도 한 게 84년 럭키의 미국 바이오텍연구소에 과장으로 입사한 그는 3년 남짓 만인 40세에 임원이 되면서 소장직을 꿰찼다. 서울대를 나와 미국에서 박사학위(생화학)를 받고 박사후 과정을 마친 것을 감안하더라도 파격적인 대우였다. 3년 뒤 상무로 승진하더니, 94년엔 귀국해 LG화학 기술연구원의 바이오텍연구소장으로 부임했다. 250여 명 거대 조직의 수장이 된 것이다. 소장 부임 2년 뒤엔 전무로 승진했다. 그는 한국에선 처음으로 미 식품의약국(FDA)의 신약 승인을 받은 ‘팩티브’ 개발을 주도하는 등 많은 업적을 냈다. 그렇게 잘나가던 그가 2000년 3월 돌연 사표를 냈다.

 “지금 하고 있는 단백질 구조 연구를 바탕으로 한 신약 개발을 하고 싶었어요. 국내외 대학 및 연구소와 제휴해 개발하려고 했지만 소장인데도 마음대로 예산을 쓸 수 없었어요. 마침 불어닥친 벤처 바람을 타고 창업에 나선 거죠.”

 그는 최고경영진의 만류로 그해 7월 자본금 1억원으로 회사를 설립한 뒤에야 퇴직할 수 있었다. 김성호 미 UC버클리대 교수를 비롯해 국내외 전문가를 자문위원으로 위촉하고 야심 차게 출범했다. 하지만 돛을 올리자마자 역풍이 불어닥쳤다. 벤처 거품이 꺼지면서 투자유치에 차질이 빚어졌다. 100억원을 대겠다던 한 대기업이 인재를 빼앗긴다는 이유로 약속을 깼다. 사무실과 장비를 마련하고 사람도 뽑았는데 걱정이 태산 같았다. 다행히 그의 역량을 평가한 다른 대기업이 50억원을 투자해 숨통이 트였다. 이후엔 정부 과제와 유유제약·아모레퍼시픽 등과의 제휴 과제를 수행하는 것으로 버텨 나갔다.

 크리스탈이 주목받은 것은 2003년 세계적 권위의 과학학술지인 네이처의 표지를 장식하면서다. 발기부전 치료제 ‘비아그라’의 작용원리를 분자 수준으로 규명해낸 것이다. 기술력을 인정받자 일본의 다이치산쿄·온코세라피, 다국적제약사인 아스트라제네카 등 해외 업체와의 제휴가 잇따라 성사돼 신약 개발에 매진할 수 있게 됐다.

 조 사장은 크리스탈의 신약 개발 과정을 자물쇠와 열쇠에 빗대어 설명했다. “자물쇠(질환을 일으키는 단백질)를 여는 열쇠(치료제)는 딱 하나입니다. 자물쇠를 컴퓨터로 3차원 분석해 내면 정확한 열쇠를 만드는 게 가능해지죠. 부작용 없는 맞춤 치료제 개발에 성공할 확률이 그만큼 높아집니다.”

 크리스탈은 현재 차세대 관절염 치료제, 수퍼박테리아용 항생제, 분자 표적 항암제 등 3종의 신약 후보를 임상시험하고 있다. 또 다른 3종의 신약 후보는 동물을 대상으로 전임상시험 중이다. 조 사장은 이들 중 관절염 치료제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현재 시판 중인 관절염 치료제는 하루 200㎎을 먹어야 하지만 우리가 200여억원을 들여 개발한 약은 2㎎만 먹어도 됩니다. 늦어도 2013년 초까지 임상시험을 마치면 2014년 시판이 가능할 것입니다. 다국적제약사와 기술 수출 상담을 하는 한편, 국내 직접 생산 여부를 검토 중입니다.”

 크리스탈은 2000년 창업 이후 한 번도 영업이익을 낸 적이 없다. 신약 개발은 엄청난 돈이 들어가지만 결실은 10~15년 뒤에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매출이라고 해봐야 제약사 등과 연구를 제휴해 받는 30여억원이 전부다.

 하지만 조 사장은 미래를 자신했다. 그는 “한국 과학기술 중 세계적으로 가장 인정받는 게 바이오 분야”라며 “정보기술(IT)이나 자동차보다 훨씬 고수익을 올릴 미래산업인 만큼 젊은이들이 바이오 창업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글=차진용 산업선임기자
사진=조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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