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된 재개발 부지 … 서바이벌 게임 판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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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4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향동동의 폐허가 된 한 건물에서 서바이벌 게임 동호회원들이 탐색전을 벌이고 있다. 이 일대는 2009년 보금자리주택지구로 지정됐지만 개발이 지연되면서 방치되고 있다. [김혜미 기자]


지난달 24일 오전 9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향동동의 폐허가 된 고무공장 자리. 반쯤 무너진 벽돌 건물 안에는 나무판자와 못, 깨진 유리조각이 나뒹굴었다. 한 걸음씩 움직일 때마다 바닥에 쌓여 있던 검은 먼지가 발을 휘감고 위로 올라와 마스크 안으로 들어왔다. “두두두두” 무너져 내린 건물 벽의 구멍 사이로 BB탄이 정신없이 날아들었다. “전사(戰死)!” 상대 팀이 쏜 총에 맞은 한 명이 권총을 하늘로 치켜든 채 건물 밖으로 빠져나오며 외쳤다. “게임 클리어(종료)!” 시작 20여 분 만에 드디어 ‘전쟁’의 종료를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날 이곳에선 서울 지역 서바이벌 게임 동호회 A팀과 B팀의 가상 전쟁이 열렸다. 본지 기자 2명도 참여했다. 이곳은 원래라면 새 아파트가 들어서야 할 자리. 하지만 건설 경기의 불황으로 아직 첫 삽조차 뜨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주택건축사업이 지지부진해지면서 방치된 재개발·뉴타운 일부 지역이 최근 서바이벌 게임 동호회의 게임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새 게임이 시작되자 BB탄이 든 총을 들고 건물 안으로 돌진하는 서바이벌 게임 동호회 회원들.


 300여㎡(100여 평)의 단층 건물은 전쟁 영화 세트장보다 더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고무공장 안은 몇 년 동안 사람이 드나들지 않아서인지 공기부터 생경했다. 참가자들은 미군이 착용하는 ACU 전투복이나 헬멧, 고글, 마스크, 조끼 등을 완벽하게 갖춰 전쟁터의 분위기를 더했다. 한 30대 남성 참가자는 “이런 동네에서 게임을 뛰다 보면 진짜 군사작전을 벌이고 있는 것 같아 짜릿하다”고 말했다.

 A팀은 최근 경기도 동탄 신도시와 은평 뉴타운 지역 등에서 두 차례 게임을 즐겼다. 서바이벌 게임 동호회는 전국에 50개 이상, 수도권에만 10여 개 이상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최근 수도권 지역 게임 동호회는 대부분 재개발·뉴타운 지역에서 게임을 즐기며 사전 답사도 다녀오는 걸로 안다”고 말했다.

 이날 A팀 회원 10명과 B팀 회원 12명은 오후 3시까지 게임당 10~20분씩 총 15차례 게임을 벌였다.

 “빵!” 쉬는 시간, 기자가 쥐고 있던 권총에서 한 발이 갑자기 발사됐다. A팀의 이모씨는 “간혹 안전장치를 채워놓아도 이렇게 오발이 나 다치는 경우가 있다”며 주의를 줬다. 게임이 끝난 뒤 권총 속에 BB탄을 남겨두지 않기 위해 전방의 허공을 향해 수십 발을 발사하던 한 팀원은 폐품을 주우러 온 남성을 보고 급히 총을 내리기도 했다. 국내에서 0.2줄(0.02kgm·1줄은 1kg의 물체를 1m만큼 움직이는 데 필요한 에너지)을 넘어서는 모의 총기 소지는 불법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내 서바이벌 게임 애호가들은 0.8줄 정도 강도의 모의 총기를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총포화약안전기술협회에 따르면 0.8~1줄 사이 총포로 BB탄을 발사할 경우 5m 거리에서 포장용 박스를 관통한다. 2004년 서바이벌 게임 도중 총알에 눈을 맞은 여중생이 실명한 일도 있다. 못, 깨진 유리조각 등이 널브러진 바닥과 반쯤 부숴놓은 건물도 위험하다는 지적이다.

  사정이 이렇지만 이들은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는다. 이 지역 관할인 화전파출소는 “서바이벌 게임으로 인해 갈등이 생기거나 피해가 신고됐을 때만 관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날 게임 도중 순찰을 하던 덕양구청 직원도 “주말마다 이 일대에서 이런 게임을 하는 것을 본다”며 서바이벌 게임을 무심코 지켜보다 이내 자리를 떴다.

김혜미·채승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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