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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아닌 신선의 필체” 추사 김정희도 경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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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면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8월 어느 날. 공군 제10전투비행전대장 김영환 당시 대령(1921~54)에게 폭격 명령이 떨어졌다. “지리산 토벌대에 쫓겨 가야산에 숨은 인민군 900명을 소탕하기 위해 폭격하라.” 편대를 이끌고 출격한 김 대령은 폭탄 투하 지점이 팔만대장경을 보관한 해인사라는 걸 알고 기수를 그냥 돌렸다. “빨치산 몇 명 죽이기 위해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을 불태울 수 없다”는 이유였다. 상부에 호출된 김 대령은 “영국 사람들은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바꿀 수 없다’고 말한다. 팔만대장경은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보물 중 보물이다. 전쟁으로 이것을 불태울 수 없었다”고 소명했다고 한다.

해인사 팔만대장경판(국보 제32호)과 장경판전(국보 제52호)이 민족의 유산으로 남게 된 사연이다.

올해는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진 지 1000년. 인쇄물이 아닌 목판이 1000년이나 온전히 보존된 것은 세계적으로 팔만대장경이 유일하다.

고려는 세 차례 대장경을 만들었다. 초조(初雕)대장경은 거란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물리치고자 1011년(현종 2년)부터 77년에 걸쳐 만들었다. 이어 초조대장경을 보완한 속장경(續藏經)이 1092년(선종 9년)부터 9년여에 걸쳐 대각국사 의천이 흥왕사에 설치한 교장도감을 통해 편찬했다. 재조(再雕)대장경은 1232년 몽골 침입 당시 초조대장경이 불 타자 1236년(고종 23년)부터 16년에 걸쳐 만들었다. 고려의 놀라운 목판인쇄기술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고려 때 이규보가 국왕(고종)을 대신해 작성한 『대장각판 군신 기고문』 『고려사』 제129권에 있는 고종이 당시 집권자인 최항에게 내린 글(초조대장경은 진병대장경(鎭兵大藏經:전쟁을 진압한 대장경) 등으로 미뤄 대장경의 조성 동기는 거란·몽골 침략을 물리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8만1258장 경판에 새긴 글자 수는 약 5200만 자, 쓰인 한자(漢字)는 1만2000자 안팎이다. 경판을 가로로 눕혀 쌓으면 백두산 높이가 되고, 이으면 길이 150리(60㎞), 무게 280t에 이른다는 연구 결과다. 보조인력을 빼고 장인만 12년간 매일 300~1000명이 작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무는 자작나무·산벚나무 등 10여 종이 쓰였다.

글씨는 마치 한 사람이 쓰고 판 것처럼 가지런하고 조화(구양순체)롭다. 추사 김정희는 이를 보고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신선의 필체”라며 감탄했다. 오·탈자는 물론 내용상 오류도 찾기 힘들다고 서지학자들은 평가한다.

지금의 돈으로 환산해 경판 한장에 최소 300만원씩 총 2500억원이 들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지금도 대장경을 한번 청소하려면 3년의 시간과 3억원의 비용이 든다. 강화도에서 제작돼 해인사로 옮겼다는 게 통설이지만 해인사 일대에서 제작됐다는 주장도 있다.

황선윤 기자

팔만대장경 연표

▶1011년(고려 현종 2년)=제작 시작

▶1087년(고려 선종 4년)=초조대장경 완성

▶ 1092년(선종 9년)=대각국사 의천 속장경 편찬

▶1232년(고려 고종 19년)=몽골군 침입, 대장경 소실

▶1236년(고종 23년)=새로 제작

▶1251년(고종 38년)=팔만대장경 탄생

자료:대장경축전 조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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