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끗발 없어 돈 못 찾아 … 이게 공정사회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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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부산 금융감독위 부산지원 입구에서 부산상호저축은행 예금자들이 항의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들은 검찰의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다. [부산=송봉근 기자]


“사기꾼들. 바린(바른)말 해라. 내 돈 내놔라. 너무 너무 원통하다.”

 26일 오후 부산시 부산진구 부전2동 금융감독원 부산지원 빌딩 앞 계단. ‘노후자금 몽땅 넣었는데 살려주이소’라고 적힌 피켓을 든 200여 명 앞에서 80대 할머니가 마이크를 잡고 목소리를 높였다. 마이크 앞에서 서툰 말솜씨로 한을 토해낸 그는 쓰러지듯 주저앉는다.

 부산2·대전·중앙부산·전주·보해·도민 저축은행이 영업정지 전날 VIP급 고객들과 은행원 친인척들에게 영업정지 사실을 미리 알려주고 돈을 불법 인출해 준 사실이 드러나자 시민들이 분노하고 있다. 파렴치한 저축은행 직원들에 대한 비난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금융감독원 조사 결과 부산저축은행은 영업정지 전날인 2월 16일 저녁 VIP급 고객 30여 명을 따로 불러 예금 140억원 정도를 불법 인출해 준 것으로 드러났다. 이때 예금을 찾은 고객은 통장당 1억원 이상이거나 후순위채권 3억원 이상의 조건을 갖춘 경우였다. 이들은 저축은행 대주주·임원의 소개로 예금을 맡긴 지역 재력가들이었다.

 부산저축은행 비상대책위원회는 이날 금융감독원 부산지원 빌딩 앞에서 2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집회를 하고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집회 참석자 가운데엔 영업정지 전날 불법 인출 사실을 뻔히 쳐다보고도 자신은 돈을 찾지 못한 억울한 사람도 많았다.

 집회에 참석한 여영자(70·경남 양산시)씨는 영업정지 하루 전날 저축은행에 갔다가 많은 사람이 돈을 인출하는 것을 목격했다. 5000만원어치 후순위채권을 매입한 그는 이자를 받으러 갔다가 사람들이 붐비는 것을 보고 “뭔 일 났능교(났는가요)”라고 직원에게 물었다고 한다. 은행 직원으로부터 “만기가 돼서 돈 찾으러 온 사람들”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여씨는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영업정지 소식을 들었다. 혼자 살면서 초등학생 조카 2명을 보살피고 있는 그녀는 “조카 양육비가 묶였다”며 눈물을 훔쳤다.

 김옥주(50) 비상대책위원장은 영업정지 다음날인 2월 18일 부산저축은행 점포에 갔다가 직원들로부터 사전 인출 이야기를 들었다.

 화가 난 그녀는 바로 112로 신고해 경찰이 출동했다. 그녀는 경찰에 “사전 인출 사실을 CCTV를 통해 확인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경찰은 “압수수색영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해 확인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김 위원장은 “끗발 있는 사람은 돈을 찾고 나머지 사람은 고통을 겪는 이 나라가 공정한 사회냐. 사전 인출된 예금은 모두 압류하라”고 요구했다.

 대전저축은행 고객 김모(58·여)씨는 “검찰의 철저한 수사를 통해 관련자들의 신상정보를 공개하고 정부는 하루빨리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전저축은행의 경우 아직 피해자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되지 않았다. 대전저축은행 피해자 160여 명 가운데 예금액이 5000만원이 넘는 피해자는 110여 명이다. 예금 규모는 90억원가량이다.

 보해저축은행의 경우 예금보장 한도 초과로 예금액을 돌려받지 못하는 피해금액은 316억원에, 피해자는 4157명이다. 부산경제정의실천연합은 성명을 통해 “저축은행 임직원들의 도덕 불감증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말해주는 결과다. 관련자들을 처벌하라”고 주장했다.

부산=김상진 기자
사진=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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