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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하루 ‘해초 먹는 날’ 정해 무인도서 생환한 조상 기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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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호 06면

1592년 6월 초, 경상도 웅천으로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 왜장 3인이 모인다. 이순신의 조선 수군에 연패하는 상황에 돌파구를 마련하는 전략회의였다. 그 뒤 7월 7일 47척을 거느린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 고성당 당포에 도착했을 때 ‘왜선 70여 척이 견내량으로 들어갔다’는 정보가 들어온다. 웅진에서 출발한 와키사카 선단이었다. 다음 날 조선군 판옥선 4~5척이 왜선을 공격했다. 유인전술이었다.

한산대첩서 이순신에게 패한 와키사카 가문

와키사카는 미끼를 물었다. 거짓 후퇴에 따라왔다. 드디어 한산도 앞바다. 조선 수군은 학 날개 모양으로 진을 펼쳤다. 그 이름도 유명한 학익진이다. 왜선 73척 중 59척이 파괴됐다.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한산대첩이다. 충격을 받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해전 금지령’을 내린다. 이순신은 그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된다. 이때 패장 와키사카는 뗏목을 타고 도주했다. 한산 대첩에서 엇갈린 이순신과 와키사카. 그러나 먼 후대, 후손의 운명은 다시 엇갈린다.

덕수 이씨 충무공파 종친회에 따르면 공의 15대 종손 이재국(당시 65세)씨는 2001년 아들 없이 사망했다. 종친회는 사망신고를 미루면서 인척인 이모(당시 29세)씨를 16대 종손으로 입양시키려 했으나 종부인 최씨와 갈등이 일어 백지화됐다. 그 이후 다른 법적 수단이 없게 됐다. 1990년 ‘호주 사망 시 사후 양자를 세울 수 있다’는 규정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충무공의 후대는 사실상 끊긴 것이다. 그러나 한산대첩의 패장 와키사카의 가문은 사정이 다르다.

와키사카 야스토모(脇坂安知ㆍ53·사진) JCC 대표. 효고(兵庫)현에서 빌딩관리회사를 운영하는 기업인이다. 그의 16대 조상이 바로 패장 와키사카 야스하루다. 와키사카 야스하루는 임란 때 충무공에게만 패했다. 이듬해 웅천 싸움에선 이겼고 1597년 정유재란 때는 거제도에서 원균을 전사시켰다. 그해 8월엔 남원성도 점령했다. 히데요시의 가신인 그는 뒤에 시스카다케 전투(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를 꺾고 패권을 장악한 1583년 싸움)에서 공을 세웠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정권을 연 에도막부에서는 그의 손자 야스마사가 다쓰노(지금의 효고현 다쓰노시) 번주의 다이묘(지역 관리자)가 됐다. 그 후 후손들은 메이지(明治)유신까지 약 200년간 다쓰노번의 다이묘를 지냈다.

와키사카 야스하루가 생전에 세워 자신이 묻힌 사찰 린카인(隣華院). 교토=박소영 특파원

야스모토 대표의 사무실엔 2007년 받은 아키히토 일왕의 감사장과 메달이 걸려 있다. 15대손인 아버지 겐지(硏之ㆍ1923~2007년)가 집안 유물과 문화재 320점을 다쓰노 시립 역사문화자료관에 기증한 것을 표창한 것이다. 야스모토 대표는 다쓰노시 역사문화자료관의 명예관장이며, 여전히 다쓰노시에서는 ‘도노사마(전하)’적인 존재다. 매년 4월 첫째 일요일 열리는 무사행렬 행사에서도 와키사키 가문은 주인공이다. 후손들은 지역 다이묘가 입던 복장에 말을 타고 행렬에 참가한다.

현재 인구 8만 명의 다쓰노시는 와키사카 가문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가문은 가조(霞城)라는 성을 짓고 지역을 다스렸는데, 무너졌던 성을 1970년대 15대 겐지가 복원했다. 다쓰노에는 에도시대 당시 간장을 담그는 집들이 많았는데, 지역산업 육성 차원에서 소규모 간장제조업체를 하나로 통합한 것도 와키사카의 조상들이었다. 그 회사가 지금은 교토를 중심으로 저염도간장 문화를 만들어 가는 ‘히가시마루 간장’으로 컸다. 중요 정상회담 때마다 일식요리를 담당하는 깃초(吉兆) 등 유명 요정도 쓰는 간장이다. 지금은 전문 경영인이 운영하지만 야스토모 대표도 이 회사의 주주다.

15대 손자 겐지가 50년 전 창업한 JCC는 효고 본사와 도쿄ㆍ다쓰노시 지사를 두고 있는 빌딩관리회사다. 전통 가부키자의 공연장을 운영하는 쇼치쿠(松竹)와 유명 주류회사인 오제키(大關) 등의 건물 관리를 전담하며 ISO 인증기업으로 성장했다.

야스토모 대표는 “후손들은 자작 칭호를 받고 다이묘 등으로 생활했다”며 “지금의 장관에 해당하는 관직이었다”고 소개했다. 해전까지는 대대로 유복하게 살았다는 것이다. 14대인 할아버지 야스지(安之)는 도쿄예술대학 1기생으로,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조상들 중에는 문화인도 많아 다기와 서예 작품 등을 많이 갖고 있었다고 했다.

야스하루는 자신이 세운 사찰 린카인(隣華院)에 묻혔다. 후손들도 대대로 함께 묻혔다. 야스토모 대표는 일본의 다른 집들이 그렇듯이 제사를 지내거나 하지는 않지만 매달 한 차례씩 교토와 다쓰노의 묘소를 참배한다. 야스하루에겐 1592년 한산대첩에서 패한 뒤 무인도에 표류에 해초를 먹으며 연명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야스토모 대표는 “아버지가 어릴 때까지만 해도 (한산대첩에서) 패전한 날에는 온 가족이 해초만 먹었다”고 소개했다. 국내 한 이순신 전문가는 “그런 사실이 기록으로는 확인되지는 않지만 와키사키 가문에서 그런 날을 정해 기념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와키사카가 ‘이순신이 너무 무서워 이름만 들어도 밥맛이 없어진다’고 했다는 얘기도 나돌지만 문헌의 근거가 없는 낭설”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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