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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명사의 조언] 서울대 이상묵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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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7월 2일 미국 캘리포니아 데스밸리 사막. 작열하는 태양 아래 차 두 대가 사막을 가르며 달리고 있었다.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이상묵 교수가 지질 연구차 학생들과 탐사 중이었다. 갑자기 앞서가던 차가 먼지폭풍 속에 전복됐다. 그 안에 타고 있던 이 교수가 정신을 차렸을 때 온몸에 감각이 없었다. 죽음의 계곡에서 살아 돌아온 이 교수는 전신마비에도 6개월 만에 강단에 복귀해 지금도 사고 전과 다름없이 연구와 강의를 하고 있다. 청소년을 위한 명사의 조언 4회는 ‘한국의 스티븐 호킹’ 이 교수와 함께한다. 13일, 봄볕에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핀 서울대를 찾았다.

글=설승은 기자
사진=황정옥 기자

이상묵 교수는 “고난에 좌절하는 대신 아픔을 극복한 ‘스토리 있는 리더’로 거듭나라”고 조언했다. [황정옥 기자]

-고개만 간신히 가눌 수 있을 뿐이다. 전신마비 장애로 어떻게 강의를 하나.

“횡격막으로만 호흡을 할 수 있어 목소리는 작지만 말은 잘 할 수 있지 않나(이 교수의 목소리는 나직하지만 카랑카랑했다). 다리 역할은 내가 타고 있는 전동 휠체어가 책임진다. 또 IT 기술의 도움이 크다. 파이프처럼 생긴 특수 마우스를 물고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다. 빨면 클릭, 두 번 빨면 더블 클릭, 불면 오른쪽 클릭이다. 빨면서 움직이면 ‘드래그’다. 내 음성을 인식해 글로 바꿔주는 프로그램 덕에 e-메일도 쓰고 워드 작업도 한다. 다만 영어 버전밖에 없어 영어를 모르는 대부분의 장애인을 위해 한글 음성인식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세종대왕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사고 6개월 만에 강단에 복귀했다. 어떤 마음으로 극복했나.

“침상에 누워 있을 때 가장 고민했던 게 이 몸으로 아버지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였다. 가족에 짐이 될까 무서웠다. 그때 한 후배가 “동급엔 라이벌이 없어 체급 하나 올렸다고 생각하라”고 말했다.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또 다른 친구는 장애인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가 사회적 성취도도 높고 인격적으로도 훌륭하다는 미국 통계를 말해줬다. 결심했다. 장애를 입었지만 열심히 사는 부모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게 제일 중요한 교육이고 아버지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그 힘으로 지금껏 열심히 산다.”

-긍정의 힘, 희망의 상징이라고들 한다.

“그렇게들 이야기하는데 난 그런 말을 책이나 언론에서 한 적이 없다.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 많기 때문에 입에 담지 않는다. 하지만 장애인들도 일반인 못지않은 직업 생활을 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전신마비에도 연세대 공대를 졸업한 신형진씨나 사법고시에 합격한 시각장애인 최영 씨를 보며 장애인도 충분히 사회 각 계층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 어린 장애인들에게 롤 모델이 되는 사례가 되고 싶다. 날 보고 희망을 가졌다는 말을 들으면 참 감사하다.”

-5년이 지났다. 사고 후 가장 달라진 것은.

“다치기 전엔 모든 것을 ‘빨리’ 또 ‘혼자’ 하려고 했다. 공부, 논문, 승진, 성공 등 모든 걸 혼자 힘으로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남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타의에 의해서 단거리 선수에서 장거리 선수로 업종을 바꾼 셈이지만 지금이 더 좋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라‘는 게 지금 내 좌우명이다. 빨리는 못 가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돕는 팀워크로 멀리, 오래 갈 자신이 생겼다.”

-힘든 시간을 겪는 청소년들에게 조언한다면.

“해답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고민하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하라. 고민한다는 것은 열등해서가 아니다. 매끈하고 유복한 삶이 인간다운 삶이 아니다. 때로는 좌절과 어려움을 겪지만 피하지 말고 꿋꿋이 이겨내고 걸어가는 것이 맞다.”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한마디 해달라.

“청소년들은 인류 역사상 유례 없는 비약적인 기술발전의 시대를 살게 된다. 사회적 변화가 없는 농경사회에서는 경험이 많은 ‘노인’이, 산업혁명 시대에는 바깥 활동을 하는 ‘아버지’가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잘 알고 미래에 대한 통찰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루 하루가 다른 이 변혁의 시대는 청소년들이 답을 알고 있다. 카카오톡이 뭔지, 앱이 뭔지 잘 모르는 부모도 많다. 부모 기준에서 유망한 진로가 청소년들의 시대에도 꼭 유망할까. 시대를 가장 잘 아는 청소년이 답을 찾아야 한다.”

-앞으로의 꿈이 뭔가.

“동료 과학자들에게 인정받는 학자가 되고 싶다. 나는 언론 덕에 ‘한국의 스티븐 호킹’으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그 어떤 수식어도 아닌 ‘과학자’로서 이름을 빛내고 싶다.”

-청소년들은 어떤 리더십을 가져야 할까.

 “마이너리티 리더십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진정한 리더는 아픔을 극복한 스토리가 있다. 더 많은 경험과 넓은 시야, 이해심이 있다. 좋은 집안, 좋은 환경에서 고생 하나 없이 자란 사람은 자신을 잘 챙길지는 몰라도 남들을 아우르기는 힘들지 않나. 오바마도 인종이란 편견을 극복한 스토리가 있어 미국을 이끄는 리더가 된 거다. 화려한 이력서보다는 인생에 스토리를 만들어 봐라. 매끈한 스펙보다 어려움을 극복한 스토리 있는 사람이 리더가 된다.”

인터뷰 중간에도 이 교수 연구실은 쉴 새 없이 학생들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는 학생들과 어울려 이번 학기에도 총 3개의 수업을 한다. 신체의 한계를 열정으로 넘어버린 그의 입에선 ‘희망‘이나 ’긍정의 힘‘이란 말이 나오는 법이 없지만 그는 온몸으로 희망과 긍정을 외치고 있었다.

이상묵 교수는

서울대 해양지질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MIT에서 해양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부터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6년에 당한 교통사고로 전신마비 지체장애 1급이 됐지만 여전히 강단을 지키며 학생들을 가르친다. 학계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지구물리학 총회에도 판구조론에 대한 연구내용을 발표하는 등 연구도 활발히 한다. 2008년에는 일련의 경험을 담은 책 『0.1그램의 희망』을 펴냈다. 장애인을 위한 기술개발에도 힘쓰고 있으며 이번 31회 장애인의 날(매년 4월 20일)을 맞아 서울시 복지상 대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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