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찍다가 국악에 미쳤다 “돈 까먹어도 마냥 좋은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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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국악음반 제작자 김영일씨는 서울 북촌부터 경주 양동 마을까지 전국의 한옥을 찾아 다니며 우리 음악을 녹음해왔다. 일제강점기에 축음기를 어렵게 구해 듣던 조부, 세상을 뜨기 직전 말러·브루크너를 들었던 선친의 음악적 열정이 그에게 남아있다. [변선구 기자]


이쯤 되면 거의 ‘광인(狂人)’이다. 8년째 국악 앨범 50여 종을 만들어온 ‘악당(樂黨)이반’ 김영일(49) 대표다. 그를 만나자마자 바로 물었다. 국악 음반은 일년에 몇 장 팔리는가. 그는 “산조 20장, 판소리 10장”이라고 답했다. 스스로 “망하기로 작심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김 대표는 지난해 한 술 더 뜨기 시작했다. 일반CD보다 음질이 좋은 수퍼오디오CD, 즉 SACD로 국악 앨범 11 종류를 내놨다. CD 한 종을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은 1000장 기준 대략 800~1200만원. SACD는 같은 기준으로 2500만원이 들어간다. 한 장에 3만원 꼴로 파는데, 100장을 못 채운다. “일년에 1000만원만 까먹자고 시작한 일인데, 이것 참 큰일났다”고 너스레를 떤다.

 그런데도 표정은 행복하다. “몸살 앓도록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앙대 사진학과 81학번인 그는 잘 나가는 사진작가였다. 기업 총수들 사진을 도맡아 찍었고, 여러 잡지에서 단골로 청탁을 받았다. 1994년, 그의 삶에 전환점이 찾아왔다. 젊은 국악인 28명을 찍은 직후였다. “소리꾼 채수정(42)의 사진을 찍으면서 한 자락 불러보라고 부탁했어요. ‘편시춘(片時春)’이 터져 나왔어요. 소름이 돋아 셔터를 누를 수가 없을 정도였죠. 국악 비슷한 것만 흘러나와도 귀를 닫았던 사람이었는데, 그 날 이후 소위 180도 달라졌죠.”

 ‘편시춘’은 인생이 봄날의 한 조각일 뿐이라는 내용의 단가(短歌)다. 그는 이 노래를 듣고 그야말로 봄꿈 꾸듯 소리에 파묻혔다. 전국의 고수를 찾아 10여 년을 보냈다.

 “지리산에서 몇 년간 소리와 싸움한 사람들과 만나 밤새 소리를 즐겼어요. 멀리서 듣고 있던 사람들도 살금살금 문지방을 넘어왔죠. 이걸 좀 기록해 놓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는데 소리꾼들은 한결같이 ‘요즘 이걸 누가 사서 들어요’ 하더군요.”

 위기의식이 발동했다. 그가 기록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산 너머 산. 10여 년간 명창 150명을 녹취해 만든 마스터테이프 300장을 들고 여러 음반사를 두드려졌지만 대답 없는 메아리에 그쳤다. 그가 음반사 ‘악당이반’을 차린 이유다.

 녹음 스튜디오는 전국 각지의 오래 된 한옥이다. “원래 우리 음악은 한옥에서 했죠. 한옥에 맞춰진 악기와 음악입니다. 마을의 습도, 지형의 울림이 집집마다 다른 소리를 만들어요. 전남 담양 소쇄원에서 가야금 산조를 녹음할 땐 벌레 소리, 대숲이 바람소리와 문지방 흔들리는 소리까지 담았습니다. 경남 함양 한옥에서 녹음했을 땐 새 우는 소리가 가야금 소리를 뒤덮었죠. 그래도 손을 대지 않았어요. 자연 입장에선 인간이 소음이니까.”

 그는 지금까지 한옥 40여 채의 소리를 담아냈다. 음질이 좋은 SACD를 고집하는 이유다. 가야금 명인 황병기 선생은 “김영일은 국악계에서 대단히 독특하면서 필요한 존재다. 돈이나 유행을 따르지 않고 국악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고 평가했다.

 김 대표의 ‘돈줄’은 따로 있다. 89년 설립한 영상회사 ‘그루비주얼’의 매출이 8년 새 100배 뛰었다고 한다. ‘악당이반’은 이 수익을 가져다 쓴다. “저는 뭔가 사라져버리는 것을 견디지 못해요. 보이는 걸 잘 담아놓으려 사진을 시작했죠. 음악 또한 담아놓고 내놓는 데에서 전율을 느낍니다.”

 그는 올해 또 ‘거덜나는 사업’을 할 생각이다. “배경·경력 없이 실력만 있는 클래식 연주자를 찾고 있어요. 그들의 특출한 음악을 SACD로 만들어 주려고요.” 그의 ‘광시곡(狂詩曲)’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글=김호정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SACD=1999년 개발된 수퍼오디오CD. 기존 CD에 비해 네 배 이상 늘어난 용량에 정보를 담아 고품질 사운드를 보장한다. 아날로그에 가까울 정도로 단순한 방식(DSD·Direct Stream Digital)으로 녹음해 원본을 거의 훼손하지 않는 점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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