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잡은 시민축제...부족한 주제의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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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이 문화관광부 후원으로 매년 새해 벽두에 열고 있는 신년음악회는 다른 공연과 달리 문화정책의 단면도를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3부 요인.외교사절이 참석해 비공개 연주로 해오던 신년음악회는 1989년부터 일반에 공개돼 열리고 있다.

지난 1일부터 3일까지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2000 신년음악회'는 매년 1월초부터 중순까지 공연장 개보수 때문에 하순으로 미뤄졌던 것과 달리 연초로 앞당겨져 관심을 모았다.

이틀간 같은 프로그램을 반복하던 전통을 깨고 3일간의 공연을 각각 다른 프로그램으로 꾸며 뒤늦게 도착한 초대권 소지자들이 되ㅣ돌아가는 사태도 빚어지지 않았다. 대통령도 참석하지 않아 입장객들이 금속탐지기를 통과해야 하는 불편도 없었다.

국립국악원 연주단이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내용의 전통음악을 들려주었던 1부 프로그램 대신 양악 오케스트라가 음악회 전체를 이끌어 감으로써 '음악과 함께 하는 신년하례식'같은 분위기에서 탈피한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올해 신년음악회는 관 주도에서 벗어나 일반 시민과 함께 하는 음악회로 자리를 잡은 셈이다.

또 올해는 KBS교향악단 대신 올해 예술의전당 기획공연 파트너로 함께 할 부천시향.서울 심포니. 코리안심포니가 하루씩 연주를 맡았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았다.

신년 벽두의 기획공연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연합합창단이 출연하고 협연자가 둘 이상이 등장하며 프로그램이 무려 10곡에 이르는 음악회라면 리허설을 위한 시간이 충분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 신인과 정상급 연주자를 한 무대에 세운다는 취지로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3일 공연에서 피아니스트 김윤지양이 협연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2번에서 1악장만 떼어서 연주한 결과 신예 연주자의 기량도 마음껏 발휘할 수 없었다. 옴니버스 스타일의 음악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발췌 연주는 한 무대에 많은 연주자를 올리려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인 연주자에게 데뷔 무대를 마련해 주면서 창작음악데 대한 관심도 표명하고 유명 연주자를 내세워 흥행까지 노리는 등 세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려 했지만 결국 초점 없는 음악회가 되고 말았다.

대체로 많은 연주자들이 등장하거나 화려한 관현악법, 웅장한 음량으로 객석을 압도하는 곡목 위주로 프로그램이 짜여 새 천년을 경축하는 분위기에는 잘 맞았으나 음악을 들으면서 차분하게 신년을 설계하는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백병동의 '산수도', 우종감의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 등 자주 연주되는 창작곡도 좋지만 밀레니엄 콘서트의 취지를 살려 신작을 위촉.초연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마지막 날 코리안 심포니의 공연도 2부에 연주됐던 요한 슈트라우스의 폴카. 행진곡.활츠만으로 프로그램을 꾸몄더라면 어땠을까.

사흘동안의 공연 중 수확이라면 '로코코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들려준 중국계 첼리스트 지안 왕이 들려준 명쾌한 음색과 시원시원한 활놀림, 호흡마저 멈추게 하는 절묘한 피아니시모가 빚어낸 황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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