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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13) 아들을 조선에 지원병 1호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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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4월 베이징 교외 샹산(香山 향산)에 머무르던 마오쩌둥과 장남 마오안잉. [김명호 제공]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한국전에 파병할 지원군(支援軍)의 명칭을 놓고 숙고했다. 뭐든지 트집 잡기 좋아하는 민주인사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뒷말을 없애기 위해서였지만, 부총리 황옌페이(黃炎培·황염배)가 그럴싸한 의견을 내놨다. “지원군(支援軍)은 파견군을 의미한다. 우리는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다. 국가와 국가 간의 대립으로 몰고 갈 필요가 없다. 우리 인민들이 조선 인민들을 지원(支援)하기 위해 자원(自願)한 걸로 하자.” 이어서 미국 독립전쟁 시절 프랑스가 지원군(志願軍) 명의로 정부군을 미국에 파견해 영국군과 싸운 사실을 상기시켰다. 마오는 귀가 솔깃했다.

1950년 10월 7일 밤, 마오는 중국인민지원군(中國人民志願軍) 사령관 겸 정치위원 펑더화이를 “늦은 저녁이나 하자”며 집으로 초대했다. 전선으로 나가는 지휘관을 위한 일종의 송별연이었다. 이날 마오는 장남 마오안잉(毛岸英·모안영)을 지원병으로 추천했다. 펑더화이는 농담인 줄 알았다. “나는 주석의 집에 지원병을 모집하러 온 게 아니다. 주석을 모병관으로 임명한 적도 없다”며 웃었다.

잠자코 앉아있던 마오안잉이 대화에 끼어 들었다. 다급하게 지원 이유를 설명했다. “나는 소련에서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레닌 군정대학을 마쳤다. 기갑부대 중위로 독·소전에도 참전했다. 지원병 1호로 나가겠다.” 아들이 펑더화이에게 하는 말을 들으며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짓던 마오는 펑더화이와 눈이 마주치자 “이 애는 우리가 못하는 러시아 말과 영어도 다 할 줄 안다. 조선에 나가면 소련인, 미국사람들과 부딪칠 일이 많을 텐데 어떻게 할거냐”라며 싱글벙글했다. 펑더화이는 항일전쟁 시절 나이 40이 넘어서야 결혼 비슷한 걸 했지만 아직도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일이 이쯤에 이르자 펑더화이도 결심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 통역이라면 몰라도 전투요원으론 절대 안 된다.” 그날 밤 펑더화이는 잠을 설쳤다. 걱정이 태산 같았다. 작은 사고라도 났다 하는 날에는 정말 큰일이었다. 생각만 해도 온몸이 오싹했다.

10월 19일 새벽, 펑더화이는 베이징반점을 나섰다. 오전 9시, 전용기가 선양(瀋陽)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가오강(당시 동북 인민정부 주석. 동북군구 사령관을 겸했다)과 함께 동북군구 사령부로 직행했다. 몇 시간 동안 압록강 도강 계획을 보고받았다. 오후에 미그-15 전투기 4대의 호위를 받으며 국경도시 안둥(安東, 1965년 단둥(丹東)으로 개명)으로 향했다.

그날 밤, 압록강 연안에는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무장 군인과 노동자, 군용차량, 포차가 강변에 바글바글했다. 가끔 조명탄이 터지고 강 건너 신의주 쪽에서 은은히 포성이 울렸다. 불빛 하나 없는 녹색 군용 지프 한 대가 압록강 대교를 건넜다. 펑더화이와 경호원 2명이 타고 있었다. 무전장비를 실은 차량이 뒤를 따랐다. 4일 후 마오안잉도 압록강을 건넜다.

펑더화이는 마오안잉을 자신의 집무실 부근에서 비서 겸 통역으로 활동하게 했다. 보초 근무를 못하게 하고 총도 지급하지 않았다. 항상 눈앞에 어른거려야 마음이 놓였다. 부사령관 덩화(鄧華·등화)와 홍쉐즈(洪學智·홍학지), 펑더화이 집무실 근무자 외에는 아무도 마오안잉의 신분을 몰랐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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