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나쁜 리더십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1941년 12월 7일 『도쿄아사히신문(東京朝日新聞)』은 ‘일·미(日米) 회담 중대국면’ ‘교섭본론 잠시 정체인가’라는 내용의 미·일 회담 내용을 싣고 있었다. 그러다 다음 날 아침 6시 대본영에서는 느닷없이 “제국 육해군은 오늘 8일 새벽 서태평양에서 미·영국군과 전투상태에 들어갔다”고 발표했다. 이것이 진주만 습격으로 시작된 이른바 태평양전쟁인데 토야마 시게키(遠山茂樹) 등이 『소화사(昭和史:1955)』에서 “전쟁 개시는 일본 국민에게도 기습이었다”고 밝힌 것처럼 일본 국민에게도 개전은 청천벽력의 소식이었다.

 히로히토(裕仁) 일왕은 12월 8일 정오에 “만세일계의 황위(皇位)에 오른 대일본제국 천황은 충성용맹한 너희들에게 분명히 알린다”는 문구로 시작하는 선전 교서를 발표하는데, 기습 개전은 11월 5일 히로히토와 총리 겸 내무상·육상을 겸임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이 함께 했던 어전회의에서 이미 결정한 ‘제국국책수행요령’을 실천에 옮긴 것이었다. 개전 과정에서 일반 국민들은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이 전쟁으로 육군 114만 명, 해군 44만 명, 군속 150만 명, 일반 국민 180만 명, 도합 500만 명에 가까운 일본인들이 목숨을 잃었다(『太平洋戰爭による我國の被害綜合報告書』). 오키나와에서는 여학생들이 목숨을 던지는 ‘백합부대’까지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로 한 치의 땅도 넓히기는커녕 그간 빼앗은 땅까지 모두 돌려주어야 했다.

 필자는 미국의 10분의 1에 불과한 경제력으로 이런 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불가사의였는데, 이노키 마사미치(猪木正道)가 『군국일본의 흥망(軍国日本の興亡:1995)』에서 이 전쟁을 ‘자폭전쟁(自爆戰爭)’이라고 규정지은 것을 보고 이해가 갔다. 1936년 8월 7일 총리 히로다(廣田弘毅)와 외상(外相)·육상(陸相)·해상(海相) 등은 육군은 소련, 해군은 미국을 적국으로 상정해 군비를 대폭 증강한다는 ‘제국 외교방침’을 결정했다. 이 무모한 ‘제국 외교방침’에 일본인들의 비극이 예견되어 있었다.

 좋은 팔로십에 나쁜 리더십이 일본 정치의 한 특징이다. 대지진의 슬픔을 함께 하면서 한·일 양국민이 비로소 하나가 되려는 때 나온 검정 교과서의 ‘독도는 일본땅 주장’은 나쁜 리더십이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나쁜 리더십을 축출할 때 일본인들이 대지진 때 보여주었던 좋은 팔로십은 이웃 국가 사람들에게 아무런 공포 없이 순수한 감동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