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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선에 선 여성 판·검사들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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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권석천
사회부문 차장

시작은 언제나 서툴고 떨리지요. 법원과 검찰, 몸 담은 곳은 다르지만 모두들 긴장 속에 재판·수사 업무를 익히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법조계 진입이 남성들에겐 위협적으로 다가오나 봅니다. 혹시 이런 얘기 들어봤는지요? “끝까지 버티고 있으면 ‘남성 T.O.’로 대법관 될 수 있다.” 요즘 젊은 남자 판사들 사이에 퍼지고 있는 얘기랍니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남성이 법원 내 소수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반영한 것이지요. 올해도 2월에 임용된 신임 판·검사 중 65%가 여성이었다죠.

 그래서일까요. 역풍도 부는 것 같습니다. 여풍(女風)이 처음 불 때만 해도 “나도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라던 법원·검찰 간부들의 자세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부터 남성 법조인들 모인 자리에 가면 여성 판·검사에 대한 불만이 나오곤 합니다. 요약하면 세 가지입니다. ①남성에 비해 사회에 대한 이해 폭이 좁다. ②결혼 후, 특히 자녀를 가진 다음엔 전투력이 떨어진다. ③판사 혹은 검사로서의 자긍심과 사명감이 부족하다.

 “군 경험이 있고 크고 작은 방황도 해본 남성과 달리 여성들은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릅니다. 아무래도 그런 점이 수사력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요.”(A부장검사) “법원의 권위는 판사들이 밤새우고 재판기록 읽으며 지켜온 겁니다. 그런데 여판사들이 늘면서 전반적으로 근무 강도가 낮아진 건 부인하기 어렵지요.”(B부장판사)

 이런 인식은 상당 부분 남성 중심주의에서 비롯됐을 혐의가 짙습니다. 술로, 의리로 관계를 다지는 남성 문화에 익숙지 않다고 해서 사회를 모르는 걸까요. 여성들이 집단주의 사고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데서 빚어진 오해일 수도 있고요. 자녀 양육에 정력과 시간을 빼앗기는 것 역시 여성들에게 책임을 돌릴 수 없습니다. 오히려 양육의 의무를 아내에게 일임하려는 대부분의 한국 남성들이 부끄러워해야 할 대목이지요.

 그렇다면 여성 법조인들이 되새겨봐야 할 부분은 없을까요. 저는 ③번 지적이 마음에 걸립니다. 그렇지 않으리라 믿습니다만, 혹시 평생이 보장되고 사회적 존경도 받는 ‘괜찮은 직업’을 갖게 된 데 만족하는 건 아닌지, 그래서 일에 대한 눈높이를 스스로 낮추는 건 아닌지 계속 자문해봐야 합니다. “여성 판사들이 가정 생활을 위해 상급직으로의 꿈을 접는 마미 트레이딩(Mommy Trading)을 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김영란 국민권익위원장이 지난해 7월 대법관 퇴임 인터뷰에서 후배들의 분발을 촉구하며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이제 여풍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입니다. 양성 평등을 넘어 법원과 검찰의 주축이란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이미 느꼈겠지만 법정과 검찰 조사실은 안온한 비너스(Venus)의 세계가 아니라 엄혹한 아마조네스(Amazones)의 세계입니다. 국민의 생명과 자유, 재산을 놓고 땀과 피가 튀는 전쟁터이지요. 자, 창(도전의식)과 방패(자신감)를 들고 뛰어드십시오. 여러분의 등장으로 강압 수사, 전관예우 같은 구태들이 걷히길 기대해봅니다.

권석천 사회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