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112)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눈물 3

노랑머리 여자의 방도, 여린의 방도 이미 불이 꺼져 있었다. 암벽을 붙잡은 손끝조차 힘이 없었다. 암벽을 타고 내려오는 일이 전처럼 수월하지 않았다. 암벽 모서리를 놓치면서 주르륵 미끄러져 내리다가 상수리나무 기둥에 머리를 짓찧고 엎어진 것과 누군가의 발이 우악스럽게 나의 목덜미를 밟은 것은 거의 동시였다. 부러진 철쭉의 날카로운 가지 끝이 목을 찔렀다.
“아하!”
“조용히 하는 게 네 신상에 좋을 거야!”

내가 짧은 비명소리를 냈고, 누군가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김실장이 아닌가. 분명히 김실장의 목소리였다. 그가 어둠 속에 은신해서 암벽 위의 내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가 보았다. 그렇다면 그는 내가 암벽 위에서 무엇을 보고 내려왔는지 미리 다 알고 있을 것이었다. 처음부터 내가 암벽 위로 올라가는 걸 제 방에서 다 내려다보고 있었을 가능성이 많았다. 말굽이 꿈틀대고 있었지만 목덜미가 단단히 밟혀 있어 속수무책이었다. 더구나 그는 이미 나의 팔 하나를 재빨리 잡아 등 뒤로 우악스럽게 꺾어 올린 상태였다.

“네놈 손 좀 봐야겠다!”
그가 헤드랜턴을 켜 대고 있었다.
“하, 하이코, 실, 실장님…….”
나는 켁켁거리며 간신히 말했다. 머릿속으로 빠져나갈 구멍을 분주히 찾았다. 나쁜 상황이 이렇게 빨리 닥칠 줄 예상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가 나를 의심해왔다면 백주사과 이사장도 나를 의심해왔을 터였다. ‘가족회의’를 하던 날, 누군가 내 방을 뒤졌던 일이 사실이 생각났다. 그 일 역시 틀림없이 김실장의 짓이었을 터였다. 나를 감시하라는 이사장의 명령을 진즉에 받았었는지도 몰랐다.
“처음부터 네놈, 수상했어!”
그가 앙칼지게 씹어뱉었다.

“이사장님도 그래. 네가 이뻐서 패밀리로 들인 줄 아냐? 곁에 두고, 너를 지켜보기 위해, 패밀리로 들인 거야, 이 멍청아! 너를 오늘밤 개처럼…… 목매달아주지, 이 개백정새끼!”
구둣발이 더욱 세게 나의 목덜미를 밟았다.
이어 밧줄로 된 올가미가 머리를 통과해와 목에 걸렸다. 미리 준비해온 올가미였다. 빠져나갈 구멍은 전무했다. 아, 하고 나는 눈을 감았다. 그는, 그들은, 모든 걸, 내가 ‘새끼개백정’이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었다. 김실장도 아마 우리집에 개고기를 먹으러 왔던 장교들 중의 한 명인가 보았다.
“너도, 죽어가는 개가 돼봐!”

내 귓구멍에 뜨거운 숨을 몰아넣으면서 그가 속삭였다.
개를 잡는 것은 보통 삼단계의 과정을 거쳤다. 어렸을 때부터 많이 보아왔으므로 내겐 너무나 익숙한 과정이었다. 먼저 올가미로 개의 목을 죽지는 않을 만큼 매달아놓고, 다음으로 육질이 연해지도록 온몸에 피가 배도록 몽둥이로 두들기고, 마지막엔 불을 질러 털을 태우는 삼단계가 그것이었다. 목 매달린 채 몽둥이로 맞아 죽어가는 개들의 단발마가 귓속에서 생생히 공명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개를 키운 것은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제는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생계는 명분에 불과했다. 어머니가 죽고 나서, 아버지는 어머니 대신 살아 있는 샌드백 같은 게 필요했을 것이었다. 폭력만이 아버지의 피를 생생히 데웠을 테니까. 개를 잡는 과정에서 얻는 쾌락이야말로 아버지를 살아 있게 하는 유일한 원동력이었다. 목매단 개의 온몸을 두들길 때 아버지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를 잊을 수가 없었다. 절치부심, 화두를 깨치기 위해 온 마음을 하나로 모아 용맹정진하는 구도자의 모습을 닮은 눈빛이었다. 아버지가 특수부대 부대장이었던 이사장이나 그의 수하 장교들을 미워한 것도, 사람대접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직접 개를 잡아, 아버지의 쾌락을 빼앗아갔기 때문이었다.
“오과장이랑 노과장도, 네놈이 죽였지?”
김실장이 덧붙여 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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