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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Focus] 『사법연수원 비밀 강의』 펴낸 부장판사 ‘전주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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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풍(女風)이 거세다. 지난해 사법시험 합격자 중 여성 비율은 처음으로 40%대를 돌파했다. 올 초 신규 임용된 법관 81명 가운데 여성이 53명(65%)이다. 외무고시 합격자는 10명 중 6명이 여성이다. 사관학교 입학식과 졸업식에서 여성이 수석을 차지하는 일도 흔하다. 하지만 초등학교 반장부터 대학 입시, 각종 고시를 휩쓰는 ‘알파 걸’들이 정작 사회에 나가서는 꼭 ‘알파 우먼’이 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뭘까. 2년간 사법연수원 교수를 지내면서 이런 현상을 흥미롭게 관찰한 전주혜 서울동부지법 부장판사를 인터뷰했다. 그는 ‘예비 엘리트’들을 가르친 경험을 최근 『사법연수원 비밀 강의』로 펴냈다.

글=박현영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전주혜 부장판사 [사진=박종근 기자]

현직 판사가 실용서를 펴내는 건 매우 이례적이다. 전 부장판사는 “20년 만에 다시 찾은 사법연수원에서 교수의 눈으로 보니 ‘연수생 때 알았더라면 지금 내 모습이 많이 달라져 있을 만한 것’이 보이더라”고 말했다. 인재가 리더가 되고, 알파 걸이 유리 천장을 뚫기 위해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이야기했다.

●무엇을 20대에 알았더라면 도움이 됐을까요.

 “원래 밑에서는 위가 안 보이고, 위에서는 아래가 훤히 보이잖아요. 나를 비롯한 부장판사들이 배석판사를 볼 때 가장 먼저 보는 게 업무에 대한 자세예요. 정말 여기서 최선을 다하려는 건지, 아니면 주어진 분량만 채우는 것인지 다 보입니다. 그걸 20대에 알았더라면 조금 더 ‘자세’를 갖추고 일했겠죠. 돌이켜보면 20대 때 내 태도가 윗사람들에겐 부족하게 보였겠다 싶어요. 어느 조직이나 마찬가지지만 사람에 대한 평판은 초기 4~5년이면 내려집니다.”

●여성이 적응하기 더 힘든 걸까요.

 “공부 잘하는 여학생으로 살다가 아무런 경험 없이 사회생활을 시작하니까 그걸 익히거나 깨달을 기회가 별로 없었죠. 남자들은 군 경험처럼 조직에 대한 희생이나 기여, 일하는 자세를 배울 기회가 많잖아요.”

●학창시절엔 여학생들이 우세하잖아요.

 “연수원 교수로 일하면서 그 부분을 흥미롭게 지켜봤어요. 학교 안에서는 여학생들이 공부를 너무 잘해서 남학생들이 주눅 들 정도라는데,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교를 거쳐 사법연수원까지 남자들에 비해 성적도 좋고 경쟁력이 있는 여성들이 사회에 나오면 역전돼요. 아직까지 한국이 ‘남자 위주의 사회’라는 점, 일과 육아를 병행해야 하는 점과 같이 구조적인 문제도 있지만 여성들이 준비가 덜 된 측면도 있어요.”

●알파 걸이 모두 알파 우먼이 되기는 어려운 건가요.

 “학교에서는 공부만 잘하면 돼죠. 하지만 사회에서는 일만 잘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일은 그 사람의 능력의 ‘일부’일 뿐이지요. 일 이외의 부분이 문제죠. ‘주어진 일만 잘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런데 연수원 교수를 하면서 보니 남들이 안 하려고 하는 궂은일을 맡아서 하는 연수생들이 오히려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

●왜 그렇죠.

 “일 잘하는 사람은 매우 많아요. 일만 잘해서는 눈에 띌 수가 없지요. 비슷한 집단에서는 실력 차이가 아주 큰 게 아니에요. 누가 만약 내게 추천을 의뢰하면 궂은일을 하는 연수생을 추천하겠어요. 희생정신, 솔선수범하는 자세는 특히 리더를 꿈꾸는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자질이에요. 젊어서 자기만 위하던 사람이 어느 날 높은 자리에 오른다고 해서 바뀌지 않죠.”

●여성이 유리 천장을 깨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게 뭘까요.

 “첫째는 탁월한 실력. 정말 일 잘한다는 얘기를 들어야 해요. 그리고 조직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무엇일지는 스스로 연구해야지요. 준비된 사람에게만 기회가 옵니다. 지금부터 10~20년 후 여성에게 기회가 많아질 거예요. 예상했던 것보다 여성의 사회 진출과 고위직 진출 속도가 무척 빨라요. 우리 때는 여자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여자라는 걸로 특혜를 볼 수 있었던 세대예요. 지금은 ‘여성 프리미엄’이 사라졌지만, 그만큼 남녀의 벽도 허물어졌잖아요. 네트워크를 부지런히 쌓고, 소통 능력을 키워야 해요. 자신만의 개성있는 리더십도 만들 필요가 있어요.”

●여성의 경쟁력 저하의 한 원인으로 육아문제가 꼽힙니다. 육아문제는 어떻게 했나요.

 “초등학교 4학년과 1학년짜리를 두고 있어요. 시계추가 왔다 갔다 하듯이 육아와 일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해요. 추는 어느 한쪽에 너무 치우쳐도 안 되지만 또 균형점이 항상 가운데일 필요도 없어요. 상황에 따라 일정 기간은 어느 한쪽에 더 기울어졌다가 다시 되돌아와도 돼요. 애들이 어릴 때는 육아에 더 치우치게 했는데, 대신 업무 이외의 개인적 약속이나 자기 계발을 포기해야 했어요. 아이가 크면 다시 일 욕심을 더 내는 거지요. 남자들보다는 조각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해요. 일하는 엄마의 모습은 어린 자녀에게는 보이지 않는 큰 격려가 된다고 생각해요.”

 전주혜 판사는 자신도 알파 걸이었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던 해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26세에 판사로 임용됐다. 1980년대 방영된 외화 TV시리즈 ‘하버드대학의 공부벌레들’을 보면서 법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여성에 대한 편견이 제일 적을 것 같다는 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판사가 됐다. 민사·형사·행정법원을 두루 거쳤다.

법정에서의 전주혜 부장판사.

●기억에 남는 판결이 있나요.

 “사회에 방향을 제시하는 판결이 기억에도 남고 보람도 느껴져요. 1995년 배석판사로 참여한 ‘산업은행 총재 뇌물 수수 사건’에서 사상 처음으로 뇌물을 준 사람도 정식 재판에 서게 했어요. 그전까지 뇌물을 준 사람에 대해서는 정식 기소를 하지 않고 약식 명령을 청구했습니다. 그 이후 뇌물 사건 재판에서 뇌물을 준 사람도 재판을 받게 됐습니다. 지난해 탈세목적으로 한 가장 이혼은 무효라는, 기존 대법원 판례와 반대되는 판결을 했습니다. 판례는 탈세 목적이더라도 가장 이혼은 유효하다고 봤는데, 나는 가장 이혼이 악용되는 것을 우려해 달리 판결했습니다.”

●직업으로서 판사의 장단점은.

 “업무를 독립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게 최대 장점이지요. 상사의 결재를 거치는 게 아니라 단독판사라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으니까요. 대인관계로 인한 스트레스도 거의 없어요. 대신 자기 관리를 엄격하게 해야 합니다. 법관은 성직자 다음 수준으로 고도의 도덕성을 요구받기 때문이지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걸 경계하게 되고, 사회 생활 하면서 알게 되는 분들도 편하게 대하지 못하는 게 죄송할 때가 있어요.”

●남의 인생이 걸린 판결을 하는 데 대해 심적 부담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재판장이 되고 나서 고민이 더 커졌어요. 가끔 안개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특히 가사 재판이 어려워요. 민·형사 사건은 증거에 따라 재판하면 되는데, 이혼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거든요. 아이의 양육권 분쟁도 그렇고. 오판에 대한 두려움은 판사라면 누구나 있을텐데, 그럴 땐 다시 당사자를 불러서 묻고, 혹시 놓친 게 있는지 기록을 다시 보고, 주위의 다른 판사의 의견도 들어요. 이런 과정을 세밀하게 거치면서 진실을 보려고 노력합니다.”

●마음에 두는 격언이 있나요.

 “초임 판사 시설 부장판사님이 해준 말씀을 새기고 있어요. ‘판사의 독립은 외부로부터의 독립뿐 아니라 판사 자신만의 독특한 가치관과 경험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겁니다.”

●책에 “대부분의 사법연수생들이 평범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것이 신선한 충격이자 희망” “의지와 노력만으로 이 자리까지 온 연수생들은 살아있는 희망의 증거”라는 대목도 있습니다. 어떤 얘기입니까.

 “경제가 성장했으니 지금 연수생들은 우리 때보다는 풍족하게 자랐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어요. 부모의 뒷받침과 사교육의 힘으로 사법연수원까지 온 아이들이 많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우리 때와 비교해도 별 차이 안 나는 평범한 아이들이 많았고, 성적 상위자 중에 강남 출신들이 거의 없고 오히려 지방 출신이 더 많았어요. 결국 스스로 공부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거죠. 콕콕 찍어주는 학원식 공부에 익숙하면 결국은 성공할 수 없어요.”

●젊은 엘리트들이 미래의 리더가 되기 위해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꿈은 클수록 좋다고 봐요. 그만큼 노력하기 때문이에요. 사회에서 자리 잡기 위해 첫 5년이 정말 중요해요. 그리고 미래 구상은 20대부터 하라고 권하고 싶어요. 도전의식을 갖고 기존 벽에도 많이 부딪혀 가면서 준비하면 기회는 올 겁니다. 대학이, 또는 사법시험 같은 관문이 인생의 최종 목표는 아니잖아요. 우리 사회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때 어떤 모습이냐로 성패를 가르는 거예요. 진짜 성공은 20~30년 후에 나타나는 것 아닐까요.”

 전 판사는 “40대 들어서 생긴 목표는 1년에 한두 가지씩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새로운 경험 하기”라고 말했다. 판사로서 가질 수 없는 경험을 쌓는 것이다. 이번 책도 그런 의미에서의 시도였다. 그의 다음 도전이 궁금하다.

j 칵테일 >> ‘총알 한 방의 법칙’

‘총알 한 방의 법칙’. 연애에 관해 사법연수생들 사이에 격언처럼 내려오는 말이라고 한다. 연수원 내에서 누군가를 사귈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뿐이라는 것. 전주혜 부장판사는 책에서 “연애 사실이 알려질 수밖에 없고, 동료 연수생을 사귀다가 헤어지고 난 뒤 또 다른 연수생을 사귄다는 것은 비난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정작 전 부장판사는 총알을 한 방도 쓰지 않았다.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진지하게 사람을 만나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 그는 연수원을 수료한 지 6년 뒤 선배 판사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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