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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인이 감염에 무방비라니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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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정재심
울산대 의대 교수

병·의원에는 다양한 감염질환을 보유한 환자들이 왕래한다. 이런 감염 환자를 돌보는 의료 종사자들은 감염의 사각지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염은 접촉, 호흡기 또는 혈액이나 체액을 통해 전파되는데 이 중 의료인들에게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경로는 혈액에 의한 감염 노출이다. 일반적으로 병·의원 직원에게 발생한 감염 노출사고 중 약 80~90% 이상이 혈액 매개 감염질환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혈액 매개 감염원에 노출되는 경로는 날카로운 기구에 의한 자상사고가 가장 흔하다. 미국 산업안전보건연구원(NIOSH)에 따르면 주삿바늘과 같은 날카로운 기구에 손상을 당하는 경우가 82%로 가장 높은 빈도를 차지하고 있다. 즉, 주삿바늘이나 메스 같은 날카로운 물체에 찔리는 사고로 바이러스 등이 의료인의 혈액 내로 직접 들어와 감염되는 것이다. 만약 이때 적절한 감염 예방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B형 간염, C형 간염, 에이즈(HIV) 감염 등이 발생할 수 있다. 자상사고는 우리나라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지난 2005년 서울 소재 한 대학병원의 의료 종사자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연구에 의하면, 6개월간 48.7%가 찔림 사고를 1회 이상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더 큰 문제는 의료 종사자들이 감염될 경우 환자들에게 옮길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감염원에 노출됐다고 모두 감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감염은 개인별 면역기능, 예방접종이나 항생제 투여 등을 통해 차단이 가능하다. 하지만 C형 간염과 같이 노출 후 적절한 감염 예방 방법이 없는 질환도 있고, 적절한 예방조치가 제공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 때문에 미국이나 일본·대만 등 많은 국가에서는 의료인의 감염에 대한 법률을 제정해 의료인 안전을 강조하고 있다. 의료인의 안전이 국민건강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시 환자나 보호자에 대한 감염관리가 최근 강화되는 추세다. 하지만 의료 종사자의 감염 예방을 위한 법률과 제도는 아직도 후진국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의료 현장의 감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혈액 매개 감염 노출의 빈도와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국가적인 감시·평가 체계가 필요하다. 또한 현행 법규나 규정의 정비와 실효적인 측면에서의 검토가 필요하다. 미국의 경우 체액·혈액에 노출될 수 있는 모든 의료행위, 특히 에이즈, B형 및 C형 간염과 관련해서는 반드시 자상사고를 예방할 수 있도록 안전 의료기구 사용을 의무화해 의료인들이 준수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의료기관 ‘안전기구 사용’ 의료법 개정안이 논의되고 있다. 의료인과 환자들이 안전하게 치료하고 또 치료받을 수 있도록 법안 개정이 하루빨리 이뤄졌으면 한다. 법·제도의 정비와 감염 예방을 위한 의료인의 노력이 함께 이뤄질 때 국민이 안전한 의료 환경에서 안심하고 치료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정재심 울산대 의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