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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20세기]20세기 한국의 사회문화적 地形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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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불 물리학이나 생물학에는 백 년을 주기로 작용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세기말에 의미를 부여하고 엄청난 고통과 공포를 느낀다. 이번의 세기말은 공교롭게도 천 년의 말과 겹쳐 있다. 내년이 되면 천 년 만에 처음으로 네 자리 숫자가 전부 다른 해를 맞게 된다. 그런 것을 십진법의 대수학적 체계에 의한 아라비아 숫자의 명기에 근거하겠다는 인간들의 결정만으로 보는 것은 너무 차가운 시각이다. 인간은 상상력을 갖고 있고, 상상계는 실재한다. 세기말의 고통과 공포의 상상은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느껴진다.

종말은 새로운 시작을 전제한 것이다. 새로운 시작 없는 종말은 없다. 유대-그리스도교의 시간적 종말관과는 달리, 한국의 전통적 사유방식으로서의 陰陽論음양론 속에서 종말은 역동적으로 이해된다. 종말 속에는 늘 시작이, 시작 속에는 늘 종말이 배태되어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2000년은 어김없이 도래할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상상계가 있다. 세기말에 이르는 한국인의 고통과 공포를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할 것인가가 문제다.

우리 사회에는 불행하게도 사회경제적 안목이 성숙하지 못하였다. 그에 따라 문화를 바라보는 안목이 심히 관념적이고 허공에 떠 버린 감이 크다.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은 사회의 이해도 곤란하지만, 사회적 내지 민중적 토대에 대한 이해없이 문화를 논의하는 것은 실로 구름잡기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래서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주제에 접근하려 한다.

뒤랑Gilbert Durand은 진작 사회문화적 지형학이란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한 사회의 '의미의 물줄기' 가운데 어느 기간을 절단하여 그 기간의 상상적 총체의 단면을 지형학(또는 지질학)
의 층위개념으로 판별해 내려는 것이다. 한 사회의 어느 기간의 사회 문화적 단면은 매우 복잡하고 다원적이며 체계적이다. 그리하여 뒤랑은 방법론의 면에서, 한 사회를 생물학적 메타포보다는 심리적 메타포로 간주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여긴다.

사회문화적 지형은 전반적 함축성 또는 그 원형적 핵심, 신화학자들의 분석대상인 사회적 '이드id', 심리학적 연구의 대상인 사회적 ‘자아’, 제도적 분석·사법적 법전화·교육학적 성찰의 영역으로서의 '집단의식' 내지 '초자아' 등 한 사회의 중층적 전개양상들과 긴밀하게 맺어져 있는 그런 도식형태로 짜여 있다. 그 지형학의 맨 아래 층에는 융C. G. Jung이 집단무의식이라 부른 것이 자리한다. 그것은 이내 원형적인 것과 표현의 옷을 입고 지역화된 문화적인 것의 두 갈래로 나뉜다. 뒤랑은 이런 지형학이 어떻게 기능하는지 알기 쉽게 보여주기 위해 긍정적 역할과 부정적 역할을 구분한다.

긍정적 역할은 하나의 유일체계로 제도화된다. 사회적 초자아는 그렇게 쉽게 일원화되는 데 비하여 사회적 이드는 다원적이면서 풍요롭고 다양한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한 사회의 인식체계를 수호하고 규범화하는 존재로서의 사회적 초자아는 규범과 사법권의 보관소이자, 통용되는 이데올로기와 교육적 규칙과 유토피아적 목표, 그리고 그 기간의 뛰어난 인물들이 집단의 역사로부터 추출해낸 교훈들의 보관소이다. 그 위상에서 미토스mythos, 신화는 에포스′epos, 서사시로 실증화되고 로고스logos로 논리화된다. 그런데 이런 사회문화적 지형 안에서의 세 가지 은유적 위상, 즉 원형으로서의 근본적 위상, 역할이 분화되어 나타나는 위상,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노력의 위상을 서로 연결시켜 주는 것이 바로 신화적 담론이라고 뒤랑은 말한다.

신화가 유토피아적 목표 아래 합리화되거나 제도나 사법적 규범 속에 좀더 명확하게 천명되거나, 또는 집단의식 속에 더욱 잘 통합되는 순간에 신화의 신화적 힘은 중화되어 약화되고 어떤 의미에서 비신화되고 만다는 것이다. 한 사회 내에는 최소한 두 신화 사이의 긴장이 존재하는 바, 예컨대 그리스에는 아폴론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디오니소스가 헬레니즘적 심리현상과 좋은 균형을 이루며 어둠 속에서 깨어 있었다. 뒤랑에 따르면, 사회가 이러한 다원성을 인정하지 않고 그 사회의 초자아가 그와 대립되는 신화적 힘을 야만스럽게 억누를 때,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격렬한 반발이 일어나고 위기가 조성된다.

사회문화적 지형학에서 하나의 사회는 어떤 제도적 합리화의 팽창과 수축의 과정을 밟거나 그 합리화가 훼손되어 반대파가 다시 등장하는 과정을 겪는다. 그러한 대립은 합리주의적 '마술 풀기'의 국면과 상상적인 '다시 마법 걸기'의 국면 사이의 대립이다. 여기서 신화적 상상계는 욕망·실망 등에 의해 촉발되는 재신화화의 열망 속에서, 반대파들에게 맡겨진 주변화의 역할을 통해 기능한다.

뒤랑을 위시한 프랑스 인류학계의 사회문화적 인식이 실로 웅대하고도 정치하다는 점을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는 그쪽 학계의 철저한 사회경제적 관심과 연구 및 철학, 사상, 문화적 고민과 토론이 배경을 이루고 있음을 나는 어느만큼 알고 있다. 뒤랑의 상상계 내지 신화적 담론은 다소 사회적 (운동)
성격이 강한 면을 갖는다. 서양 사회의 연구에 바탕한 그의 문화개념을 동아시아 문화 읽기에 적용하는 데에는 당연히 무리가 따른다. 우리 사회에는 우리 나름의 신화와 역사적 체험, 그리고 상상계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뒤랑의 사회문화적 지형학의 신화적 담론은 매우 역동적이고 유용한 틀을 제공한다. 우리의 지난 한 세기의 문화를 바라보면서 나는 그의 틀을 내내 염두에 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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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4월 한성전기회사는 최초로 종로에 전등(가로등)
세 개를 설치한다. 이 밖에 1900년에 우리 나라 최초로 나타나는 것이 여럿 있으니, 7월에 京仁 간 시외전화가 최초로 개통되는 것 등이다. 12월에 태극기 규정이 발표되는 것도 주목된다. 우리의 20세기는 종로의 가로등 설치와 함께 밝아온 셈이다. 종로의 어둡던 밤거리가 이로써 대낮처럼 훤해지면서 한국 사람들은 그것을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신호로 여기고 희망과 기쁨에 젖어 있었다.

李能和이능화는《朝鮮巫俗考조선무속고》(1927)
에서 도깨비獨甲를 다루면서 이렇게 썼다.

닒겨망량을 우리말로 도깨비라 하는데 巫에서는 도깨비를 대감이라 한다. 흔히들 망량이 장난하여 사람을 괴롭힌다 한다. 돌을 던져 창을 깨거나, 어떤 물건을 나뭇가지에 걸어 놓기도 하고, 방화하여 가옥을 태우기도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무당을 불러 굿을 벌이고 그에게 빈다. 서울에 전등이 켜진 이래 망량이 일시에 자취를 감췄다. 무릇 幽陰유음의 귀신이란 광명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금세기 초 한국 지성계를 대표하는 인물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이능화는 불행히도 우선 두 가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망량이 원래 중국 귀신으로서 산에 떠돌아다니며 사람들을 해꼬지하는 귀신류인데 조선조 유학자들에 의해 이 땅에 수입된 것, 그리고 한국 전통신앙인 무에서 도깨비는 (터)
대감이고 터대감은 해당 터를 관장하는 (조상)
신령이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러니 터대감이 대문이랑 방문을 붙잡고 흔들흔들, 돌을 집어 후당퉁탕, 모래도 집어 주르르르 하는 것이 거기 사는 사람들에게 조상과 신령을 제대로 모실 줄 알아야 한다고 경고하는 것임을 이능화는 도무지 알아차릴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의 20세기가 종로 밤거리의 가로등 불빛으로 시작되면서 도깨비가 없어져 다행스럽다고 희희낙락하는 한국인의 모습은 이후 한국 사회 백 년의 전개에 대한 상징적 전조를 보인다.

이후에 전개되는 한국 사회의 형태는 변화무쌍하다.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을 거쳐 1910년에는 한일합방에 의해 공식적으로 조선왕조가 몰락하고 한국은 36년간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1945년 해방의 환희는 잠깐뿐 이내 한국 사회는 열강의 신탁통치에 들고 남북은 이념의 대립으로 치닫는다. 1948년 남쪽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나 1950년에 한국전쟁의 발발로 한국 사회는 폐허로 화하고 남북은 분단을 맞는다. 한국 사회가 허리를 잘린 채 두 동강 나고 만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독재정권과 4월 혁명, 군사독재정권의 대두와 민주화 투쟁 등을 숨가쁘게 겪는다. 이어 대망의 문민정부의 실현을 보게 되나 세기말에 와서는 IMF 체제라는 위기국면에 처하여 오늘에 이른다. 한편 박정희 정권 이후 한국 사회는 급격한 산업화·구미화의 길을 치달려 온다.

이 역사의 흐름을 일관하건대, 그 특징은 격변의 연속이다. 그것도 고통 속의 격변이었다. 나라가 망하고 남의 식민지가 되고 민족상잔의 전쟁을 치르고 나라가 쪼개지고 오랜 독재 아래 신음하였으며 끝내 경제파탄의 국면을 맞았다. 한 나라가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과 수모를 당하며 목숨을 부지해 온 셈이다. 이러한 격변과 고통의 와중 속에서 근대화 내지 서양화와 산업화가 꾸준히 진행되어 온 흐름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것을 어떻게든 경제적으로 잘 살아 보려는 몸부림으로 보아도 좋다.

이와 함께 우리 사회에 그 동안 지배적인 가치관이 없었음이 주목된다. 지배적 가치관이란 한 사회의 바람직한 삶과 관련된 객관적 당위성의 인식이다. 그것은 그 구성원들의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그런 것이 우리 사회 백 년 간 보이지 않는다. 격변의 연속이었으니 그런 것을 챙길 겨를이 없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어쨌든 이런 면에서 보면 우리 사회는 그 동안 뚜렷한 가치관 없이 살아남기 위하여 정신없이 달려오기만 한 것으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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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에는 한 왕조의 몰락에 이어 새로이 출현한 왕조가 전 왕조의 역사를 서술해야 하는 역사인식의 전통이 있다. 고려사가 조선왕조에 의해 서술된 것이 그 보기이다. 이것은 새 왕조가 전 왕조를 계승한 것이라는 정통왕조 인식을 기반으로 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 왕조가 전 왕조의 낡은 가치관을 정리하고 새롭게 펼쳐지는 시대에 걸맞는 새 가치관을 만방에 공표하는 뜻을 갖는다.

이에 비추어 보건대, 우리는 조선왕조 멸망 이래 조선왕조의 역사를 제대로 정리해 내지 못했다. 일제가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하고 그와 유사한 작업을 진행하였으나 그 저의가 우리 역사의 왜곡에 있었던 것임은 이제 잘 알려져 있다. 해방 이후에는 역사서술에 관한 우리의 전통적 역사인식이 단절되어 버렸을 뿐 아니라 사회의 격변 속에서 그에 대한 관심과 겨를이 도무지 생겨날 수 없었다. 이 점은 지난 백 년 한국 사회문화의 구조와 성격을 이해하는 단서로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한국 사회가 조선왕조의 낡은 가치관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한국 사회가 아직 조선왕조의 낡은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 사회가 그 동안 외형적으로는 대거 서양 사회의 모습으로 탈바꿈하여 왔으나 내면의 의식세계는 조선조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조선조는 이미 그 잘못된 가치관으로 인하여 망하고 말았건만, 제법 현대화되었다고 으스대는 우리가 그 망한 왕조의 낡은 가치관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울지 못할 비극이고 웃지 못할 희극이다. 한국 전통문화라면 아무런 생각 없이 으레 조선왕조의 것을 들먹이는 것은 그런 사정을 잘 반증한다.

조선조 사회문화의 특징적 구조를 한번 살펴본다. 조선조는 양반을 지배계층으로 한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견지하였다. 사회구성에서는 양반 아래 농민·공장·상인이 상민으로서 생산과 유통에 종사하고, 사회의 밑바닥에는 노비·무당·백정·광대 등이 천민계층을 이루고 있었다. 같은 양반이라도 무반은 문반보다 경시되었다. 종교, 사상면에서는 관념적이고 배타적인 성리학이 정치이념으로 내세워지고 전통신앙인 무와 불교는 억업과 천대를 받았다. 그리고 유교의 가부장제적 가치관으로 인하여 남존여비의 관념이 상존하였다.

이것만 놓고 보더라도 조선조의 사회문화는 크게 이원적 구조를 취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상층에는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남성·성리학 등이 자리잡고, 하층은 천민·여성·무·불교 등으로 구성된다. 농민과 장인들은 상민계층에 속하여 있었지만 지배층의 수탈대상이었다는 점에서 하층에 넣어 보아도 좋겠다. 19세기 후반 동학혁명의 전야, 농민들의 처지는 30여 종의 세금에다 양반들을 위한 노역과 그들의 가혹한 私刑에 신음하고 있었던 바, 농민을 사회의 하층으로 파악해도 무방할 것이다.

무는 원래 고조선 이래 한민족의 전통적인 조상숭배 신앙이다. 그것은 고대사회와 삼국시대 초기까지도 국가적 제전으로서의 天祭를 축제로 벌였고 그와 관련하여 한국의 전통 문화예술 각 분야의 기원이 되기도 한다. 우리의 전통연극, 춤, 음악, 서사문학 등이 무에서 유래하였음은 이제 정설로 되어 있다. 그것은 또한 하느님을 비롯한 제반 신령과 조상을 받들고 굿판에 모셔 놀며 天地人의 調和를 이루어내는 신화의 세계이기도 하다. 불교는 진작 이 땅에 도입되어 왕실과 민중에 두루 신앙되던 우리의 전통종교다. 이 두 신앙이 조선조 내내 핍박을 당하고 천대받는다. 무와 불교가 이루어낸 유무형의 전통문화는 한국 문화의 기반을 조성하고 실로 방대하건만, 조선조에서는 무당과 승려가 함께 천민으로 규정되어 갖은 사회적 천대를 감내해야 했다.

남성 위주의 조선 사회에서 여성은 많은 사회적 제약을 받고 남성의 잠자리 대상이자 자식을 생산하는 도구쯤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들은 무와 불교를 신봉하면서 그 잘못된 인식의 고통을 견뎠다. 장인과 농민과 상인들도 대부분 전통신앙 쪽이었다. 그들은 생업에 종사하면서 각종 민속문화를 일구었다. 광대와 사당은 오늘날 개념으로 보자면 전문 놀이꾼이자 예술인이다. 이들이 정신면에서 무불과 직결되어 있었음은 물론이다. 조선조 사회 하층의 사회문화적 성격은 무의 신화성, 전통 문화예술, 무불의 전통신앙, 천대와 억압받음, 여성성, 생업성 등으로 정리된다. 이러한 성격의 사회문화가 조선조에서 사회의 주변과 기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조흥윤/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emerge새천년(http://emerge.joongang.co.kr) 1999.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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