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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혈질’을 ‘남자답게’로 고친 학생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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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지난달 서울의 한 외고를 졸업한 A씨는 고3 때 학교생활기록부 사본을 뽑아 보곤 걱정이 앞섰다. 수시전형에 제출한 자기소개서에 장래희망을 ‘교수’라고 적었지만 1·2학년 생활기록부에는 ‘외교관’이었기 때문이다. A씨는 서류평가에서의 불이익을 우려해 담임교사에게 모두 ‘교수’로 바꿔 달라고 요청했다. 또 공란으로 있던 특기사항에는 ‘학술 동아리 활동을 통해 학문의 깊이를 더해 가고 있다’는 내용을 추가했다. 담임교사는 학생의 미래가 걸린 일이라 요구대로 수정했다.

 서울시교육청은 이같이 학교생활기록부를 임의로 수정해 준 서울시내 30개교를 3월 한 달간 표본 감사한 결과 23개교를 적발하고 담임교사 및 교장·교감 227명에게 경징계와 경고·주의 처분을 내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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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청이 적발한 1270건의 정정 건수 중 진로지도 영역에서 수정한 사례가 515건으로 가장 많았다. 1·2학년 때는 교사·회계사가 장래희망이었다가 3학년 때 의사로 진로가 바뀌면 1·2학년 기록이 모두 ‘의사’로 바꾸는 경우다. 또 ‘다혈질적인 면이 있다’ ‘학습 성취도가 저조한 편이다’ 등 부정적으로 서술된 행동특성도 ‘올곧은 성품이다’ ‘성취도가 우수한 편이다’ 등 반대로 수정된 경우도 적발됐다.

 적발된 23개교 중 유형별로는 특목고(11개교)와 자율형 사립고(9개교)가 가장 많았다. 특히 외국어고는 서울시내 6개 학교가 모두 적발됐다. 한 외고는 지적 건수가 69건에 달했다. 시교육청 한홍열 감사담당 장학사는 “상위권 학생들이 많은 데다 대입 결과로 학교 이미지를 높이려다 보니 특목고에서 적발 건수가 많았다”고 말했다. 입시전형이 너무 복잡해 수험생들이 지원에 앞서 학교별 전형기준에 맞춰 내용을 수정하는 것도 현실이다.

 이번 감사는 지난달 송파구의 한 자사고가 재학생 360명 가운데 270여 명의 생활기록부를 임의로 정정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시작됐다. 앞서 교육과학기술부는 학생부의 신뢰성 문제가 불거지자 서류를 무단 정정하는 행위를 ‘학생 성적 관련 비위’로 분류해 관련자 파면 등 중징계를 내리는 대책을 지난 2월 발표했다. 또 대학 측이 고교에 학생부 정정대장을 요청할 수 있도록 하고, 한국대학교육협의회를 통해 학생부 신뢰도가 낮은 고교는 명단을 작성해 시·도교육청에 통보하는 방안도 추진키로 했다.

 하지만 일선 교사들은 지나친 행정 규제라며 반발하고 있다. 양천구의 한 고교 교사는 “컴퓨터 입력 오류로 오·탈자가 자주 발생하고, 가치관 형성 과정에서 학생들의 장래희망도 자주 바뀐다”며 “시교육청 감사 이후 수정 절차가 복잡해져 정당한 수정도 포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학생들이 학생부 기록을 너무 민감하게 생각하는 것도 문제다. 조효완 은광여고 교사는 “1·2학년 때는 진로 탐색 과정”이라며 “3학년 때 장래희망이 바뀌어도 당락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민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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