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쾌한 설악의 꽃, 캔버스에 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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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붉은 색감이 자연의 호방한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김종학의 ‘숲’ (1985). 소문난 민예품 컬렉터인 그는 오방색에 기초한, 화려한 한국적 색감을 구사한다. 그의 60년 작가 인생을 돌아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1979년 나는 설악산으로 도망갔다. 가정도 떠나고 싶었고 화단으로부터도 떠나고 싶었다. 한번밖에 살지 못하는 유한한 존재인 사람으로 태어난 나는 내 마음대로 살아가고 또 내 마음대로 그리고 싶었다. 그리고 정말 고독하고 싶었다. 자연과 같이 살면서, 봄에는 봄, 여름에는 여름, 가을에는 가을, 겨울에는 겨울을 그리고 있다.”

 “그림 그리기란 사람이 자유롭고자 함인데 지금까지 이념의 노예가 되었던 것은 말도 안 된다. 눈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자연을 그리는 것이야 말로 화가의 숙명 이다.”

 ‘설악산 화가’로 잘 알려진 김종학(75·사진)의 말이다. 그의 60년 화업(畵業)을 정리하는 회고전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서울대 회화과를 나온 김씨는 앵포르멜(Informel·비정형 추상회화)에 심취했다가, 설악산에 들어가 30여 년간 설악만을 그려온 화가다. 한때는 ‘이발소 그림도 아니고 웬 꽃그림이냐’는 비아냥도 받았다. “평생 100 장의 좋은 그림을 남기고 죽자, 그때까지 억지라도 살자”던 그는 어느덧 대중이 사랑하는 대표작가가 됐다. 국내 작가 중 가장 작품이 많은 작가(4000여 점)로도 꼽힌다.

 전시에는 1959년 초기작에서부터 일본·미국 유학 시절, 그리고 이혼과 함께 설악에 들어가 최근에 이르는 전 과정이 두루 보여진다. 녹음이 짙게 우거져 인기 높은 여름 시리즈 외에 비교적 덜 알려진 가을, 겨울의 애잔한 설악산 풍경화도 볼 수 있다. 작가는 스스로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으로, 여름 설악인 ‘파라다이스’, 죽어가는 꽃도 아름답다며 갈색톤으로 애잔하게 그린 ‘가을’, 먼 바다 오징어잡이 배를 꽃처럼 묘사한 ‘동해어화’, 세 점을 꼽았다.

 “제가 처음 설악산에 갔을 때 죽고 싶을 만큼 쓸쓸했지요. 일종의 귀향살이였으니까. 봄에 야생화가 피는데, 추상화를 할 땐 거들떠 보지 않던 야생화들이 괴로울 때 보니까 너무 큰 위로가 되고 예쁜 거예요. 그때, 아, 이거다 싶었죠. 추상화의 주제가 한정돼 있다면, 꽃과 자연의 테마는 계절에 따라 무궁무진하죠. 물론 울긋불긋 꽃과 새를 그리자 타락했다는 비판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의 꽃그림은 그러나 단순한 구상이 아니다. “추상에서 시작해 구상으로 왔지만, 추상에 기초를 둔 새로운 구상” 이라고 스스로 정의한다. “사실적으로 피는 꽃이 아니라 화면 위에서 다시 구조적으로 피어나는 꽃”이란 뜻이다. 소문난 민예품 컬렉터인 그의 한국적 미감을 담은 강렬한 색감의 꽃들은 화폭을 터질 듯 가득 채운다. 그저 예쁘기보다 남성적 호쾌함이 넘치는 꽃들이다. 때로는 팔레트 없이 직접 캔버스에 물감을 짜, 투박한 마티에르(질감)를 빚어내기도 한다.

 “추상화에서 추구하는 의미는 열 단어에 지나지 않아요. 하지만 자연에는 무수한 어휘가 있습니다. 세잔이, ‘자연은 곧 사전’이라고 말했던 것처럼요.”

 이순령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고갱에게 타이티가, 앤젤 아담스(미국 사진가)에게 요세미티가 있다면 김종학에게는 설악이 있다. 그의 그림은 설악산이라는 지리적 공간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의 산하, 넓게는 보편적인 자연의 모습을 담고 있다”고 평했다. 6월26일까지. 좌담회 ‘김종학과 친구들’(김봉태·김형국·송영방·윤명로)도 15일 마련된다. 02-2188-6000.

양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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