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기포 없앤 건 샴페인 제조법 덕분 … 그게 바로 트리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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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문제 : 1996년 일본의 자동차 업체 혼다는 날씬한 모양의 오토바이를 만들기 위해 고심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펑퍼짐한 연료통을 날씬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면 담기는 기름 양이 줄어 오토바이가 멀리 갈 수 없었다. 혼다는 궁리 끝에 연료통의 크기를 줄이면서도 기름은 전만큼 담을 수 있는 해결책을 찾았다. 무엇일까.

 답 : 오토바이 차체 뼈대의 속이 비어 있음을 발견하고 여기에 연료를 넣을 수 있게 했다. 뼈대에 들어가는 기름 양만큼 연료통 부피를 줄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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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다가 찾아낸 해결책은 전문적인 기계공학 지식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기름이 연료통에만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남으로써 얻은 답이다. 이는 기술혁신 컨설팅기업인 GEN3(젠스리) 파트너스가 찾아내 혼다에 전해줬다.

 GEN3가 사용하는 이 같은 기술혁신의 방법은 ‘트리즈(TRIZ)’라 불린다.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하는 원리’를 뜻하는 러시아어 ‘Teoriya Resheniya Izobretatelskih Zadach’의 머리글자를 땄다. 지난달 15일 기업들을 대상으로 트리즈 관련 강연을 하러 한국에 온 세르게이 이코벵코(55)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 겸 GEN3 이사는 “트리즈는 기업이 직면한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인 원리”라고 말했다.

 “기름은 반드시 연료통에 넣어야 한다는 식으로 고정관념에 매몰돼 있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보다는 ‘기름은 어딘가에 담으면 된다’는 식으로 문제를 보다 일반적인 상황으로 바꿔놓고 답을 찾으면 해결책이 생각보다 쉽게 도출될 수 있습니다.”

 이코벵코 교수는 다른 예도 들었다. 대리석을 자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을 때, 보통은 관련 전문가 등을 통해 정보를 모은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 조금 더 나은 절단 방법을 찾을 수는 있겠지만, 혁신적인 기술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게 이코벵코 교수의 지론이다. 그보다는 대리석을 그저 ‘고체’라 생각하고, 자르는 것도 ‘쪼개는 것, 떼내는 것, 부수는 것’ 등으로 다양하게 생각하면서 ‘고체를 가장 잘 자르고 쪼개고, 부수는’ 분야를 찾으면 거기서 대리석을 자르는 제일 효과적인 방법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반도체 공정에서 자꾸 기포가 생겨 어려움을 겪던 한 반도체 기업은 문제 해결 방법을 샴페인 제조공정에서 찾았다”며 “샴페인 제조에서는 기포 관리가 핵심 공정이어서 해결책을 찾기가 수월했다”고 말했다.

 이코벵코 교수는 기업들이 활용하는 혁신의 방법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에 대해서도 차근차근 설명했다. 초기 단계의 혁신은 기업의 개발자와 대학의 교수가 주도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한두 명 전문가가 가진 지식을 뛰어넘는 혁신을 이룰 수 없었다. 다음 단계는 기업 간의 협업. 예를 들어 완성품 업체와 부품 기업 간의 소통을 통한 혁신이다. 이를 통해 체계적인 문제 해결 방법을 찾을 수는 있었지만 창의적인 기술개발을 이끌어 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고 이코벵코 교수는 지적했다.

 이보다 더 발전된 것이 ‘초기 열린 혁신’이라 불리는 방법이다. 제품개발에 핵심 기술을 가진 기업을 인수합병(M&A)하는 방식이다. 새로운 기술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기존에 나온 기술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기술을 얻기는 힘들다.

 이코벵코 교수가 주장하는, 이런 것들을 넘어선 단계가 바로 트리즈를 활용한 ‘체계적인 열린 혁신’이다. 그는 “트리즈는 무엇보다 문제가 발생한 분야를 넘어 온갖 다른 분야에서 혁신의 방법을 찾기 때문에, 이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해결책까지 얻게 된다”고 말했다.

 공학을 전공한 이코벵코 교수는 87년 소련의 한 기업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 우연히 트리즈의 창시자 겐리히 알츠슐러의 강의를 듣게 됐다. 이후 그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트리즈에 전념해 70건에 이르는 특허를 냈다. 미국으로 무대를 옮긴 그는 트리즈와 관련해 유수의 글로벌 기업 등에서 수백 회 강연을 했다.

 지난달 15일 서울 논현동 임페리얼팰리스 호텔에서 열린 ‘트리즈를 활용한 비즈니스 성장 전략’이란 주제의 강의에서 이코벵코 교수는 “이제 기업들은 트리즈를 이용해 체계적인 혁신을 실천하면서 비용과 시간을 줄여나가고 있다”며 “특히 기존에 나온 기술을 뛰어넘으려는 첨단 기업에 유리하다”고 말했다.

 그가 일하는 GEN3는 현재 전 세계 8000여 명의 외부 전문가를 연결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다. 기업이 문제 해결을 요청하면 GEN3는 문제를 이들 전문가에게 보내고, 전문가들은 자신의 지식을 동원해 해결책을 제시한다.

 워낙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포함되다 보니 자동차 기업이 의뢰한 문제의 답이 식품 업계에서 나오는 경우도 있다. 이코벵코 교수는 “이 같은 방법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미 나와 있는 기술의 특허를 피해가는 데도 유용하다”며 “이름은 밝히기 곤란하지만, 한국의 한 업체도 트리즈를 활용해 신기술을 개발함으로써 외국 경쟁업체와의 특허 문제를 해결한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권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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