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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들이여, 이젠 '마법의 성'의 공주를 구해주지 말자!

중앙일보

입력

이젠 제법 오래되었다고 여겨지는 가요 중에 〈마법의 성〉이란 노래가 있다. 이 노래는 두 가지 버전으로 나와 있는데 그중 백동우 어린이(지금은 아마도 훌쩍 커 청소년이 되었을 테지만)가 부른 〈마법의 성〉은 듣는 이의 마음을 맑고 따뜻하게 해주는 매력이 있는, 정말 아름다운 노래였다. '믿을 수 있나요. 나의 꿈 속에서 너는 마법에 빠진 공주란 걸~' 뭐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말을 들을 때마다 예전에 즐겨 하던 오락게임 〈페르시아의 왕자〉가 떠오르기도 하고, 아주 어렸을 때 읽었던 만화 〈캔디캔디〉가 기억나기도 한다.

그런데 요즘 이 노래와 똑같은 제목의 드라마가 KBS2TV에서 방영되고 있다. 이미 여러주 동안 방영되었지만 한번도 시청률 순위에 오르는 걸 본 적이 없고 아울러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것도 들은 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리 화제작은 아닌 모양이라고 짐작하면서도 내가 요즘 유준상이라는 성실하게 생긴 탤런트에 관심을 갖고 있기에 그냥 챙겨보고 있는 중이다. 제목에서 풍기는 만화 같은 톡톡 튀는 재미와 발랄함도 자못 기대하면서.

그러나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드라마 〈마법의 성〉은 일본만화 〈캔디캔디〉의 복사판 같다. 거기에 60, 70년대에 무작정 짐싸들고 서울로 올라와 갖은 고생을 하며 서울살이를 하던 시골 처녀들의 애환까지 곁들이는데 이 모든 게 너무나 익숙하고 식상해서 오히려 횟수가 거듭될수록 점점 맥빠지고 지지부진해진다. 주인공 윤희(이나영)는 할머니와 함께 시골에서 살다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서울의 한 백화점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 애자(송선미)의 집으로 와 신세를 지고 있다. 윤희는 서울로 오자마자 버스에서 지갑을 소매치기 당하고 그것을 끝까지 찾아준 풍진(유준상)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DJ가 꿈인 윤희가 우여곡절 끝에 들어간 백화점의 실장 조민서(황인성)가 윤희를 도와주다가 어느새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드라마에서 빠지면 섭섭한 삼각관계가 이뤄진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삼각관계가 윤희의 방송실 선배 강성란(김시원)과 조 실장, 그리고 윤희 이렇게 세 사람에게서도 형성된다.

여기까지만 얘기해도 〈캔디캔디〉와 비슷한 게 너무나 많다. 불우한 환경이지만 착하고 당당한 주인공(캔디는 고아, 윤희 또한 할머니의 죽음으로 고아가 된 셈이다)과 그들이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 바람처럼 나타나서 도와주는 따뜻한 남자(안소니, 유준상), 그리고 약간 반항적이고 도도하지만 나름대로의 아픔을 지녔기에 주인공에게 은근히 의지하고 기대는, 사랑해줄 수밖에 없는 남자(테리우스, 조민서)와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녀들(이라이자, 강성란) 등등.

어른들이 가끔 말하듯, 사람들은 제각각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그 삶들을 찬찬히 뜯어보면 다 거기서 거기라는 것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일까? 그렇기에 매번 드라마에서, 만화에서 본 듯한 삶이 등장하고, 영화에서 보았던 것 같은 얘기가 나올 때마다 '그래,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다 그런 거야'라고 수긍하면 아무 문제 없는 걸까?

또 왜 주인공은 항상 착하고 예쁘며 주변에서 도와주는 사람들은 왜 또 그리 부자거나 재벌, 권력자인지.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왜 도와주는 사람과 주인공은 꼭 사랑에 빠지고 마는 것이지 등등, 정말 가슴을 칠 일 뿐이다. 게다가 항상 사랑은 재벌과 서민(더 꼬집어 말하면 가난한 사람) 사이에서 생겨나고 그것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모티브가 된다. 얼마 전에 끝을 맺은 〈햇빛 속으로〉에서도 인하와 연희, 수빈과 명하의 사랑 사이의 걸림돌은 결국 신분차이였는데 〈마법의 성〉에서도 그런 부분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그래서 드라마에 짬짬이 나오는 달동네나 재개발을 기다리는 철거촌의 모습은 더욱더 서글프다. 그 자체로도 충분히 드라마가 될 텐데 항상 드라마에서 배경으로만 비춰지는 철거민과 도시빈민의 문제들이란...

얘기가 길어졌지만 아무튼 앞으로 남은 드라마 〈마법의 성〉 방영분에서는 '마법의 성'에 갇힌 공주(윤희)가 백마탄 왕자들의 도움없이 스스로 성을 뒤덮고 있는 가시밭길을 헤치고 나와 우리 앞에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공주라는 굴레는 그 성 한구석에 던져놓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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