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럽 바닥 불룩하게 발상 전환, 모래 훑는 ‘폭파샷’ 창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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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호 20면

여배우 캐서린 헵번,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과 염문을 뿌렸던 백만장자이자 영화제작자 겸 비행기 조종사 하워드 휴스(1905~1976)는 골프도 매우 좋아했다. 휴스는 밤에는 여배우들과 즐겼지만 낮에는 프로골퍼들과 어울렸다. 그의 친구 중에는 정상급 프로골퍼인 진 사라센(1902 ~1999)도 있었다. 휴스는 1931년 사라센에게 비행기 조종법을 가르쳐줬다. 사라센은 비행 중 보조날개의 움직임을 보고 영감이 떠올랐다.

성호준의 골프 진품명품 <6> 진 사라센의 샌드 웨지

이듬해 사라센은 디 오픈과 US오픈에서 우승했다. 사라센은 원래 벙커에 들어가면 젬병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벙커에서 훨훨 날았다. 동료들은 “분명 뭔가 있다”고 의심했고 결국 그가 벙커에서 비밀병기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사라센 이전까지 벙커는 말 그대로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벙커샷을 위해 발명된 클럽도 여러 가지였다. 숟가락처럼 페이스가 오목한 스푼 클럽과 그루브(클럽페이스의 홈)가 매우 깊은 클럽, 페이스가 갈퀴처럼 돼 모래가 빠져나가는 클럽 등이다. 몇 년 전 한국에서 갈퀴형 샌드 웨지를 발명했다고 광고가 나온 일이 있는데 이미 19세기에 이런 클럽이 있었다.

이 중에서는 스푼 클럽이 가장 많이 쓰였다. ‘골프의 신’이라 불렸던 바비 존스도 이 클럽을 썼다. 숟가락처럼 벙커에서 볼을 퍼내는 샷을 할 수 있게 고안됐다. 하지만 스윙 중 투터치를 할 위험이 컸고 이후 불법 채로 사용이 금지됐다. 다른 벙커 전용 클럽들도 ‘불법 무기’ 판정을 받아 퇴출됐다.

사라센은 상황에 따라 각도가 바뀌는 비행기의 보조날개를 보면서 골프채 리딩에지(클럽페이스 하단의 날) 각도도 획일적일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벙커에서는 리딩에지의 각이 날카로우면 모래에 깊숙이 들어가 박히기 때문에 오히려 뭉툭한 것이 낫다고 봤다. 그는 솔(클럽페이스의 바닥)에 납땜을 해 불룩하게 만들었다. 불룩해진 바닥은 스윙 시 리딩에지보다 먼저 지면에 닫았다. 그 덕분에 클럽은 모래에 깊숙이 박히지 않고 모래 아래 1~2㎝ 정도에서 미끄러져 나갈 수 있었다. 볼을 직접 때리는 것이 아니라 모래를 훑으면서 볼이 튀어나오게 하는 이른바 폭파샷이 가능해진 것이다.

사라센이 고안한, 클럽 헤드 바닥의 불룩 튀어나온 부분을 바운스(bounce)라고 한다. 바운스가 있는 클럽은 벙커뿐 아니라 진흙 같은 부드러운 라이에서 클럽이 땅속에 박히는 것을 막아준다.

사라센이 샌드 아이언이라고 부른 이 클럽은 불법 클럽이라는 판정을 받지 않았다. 이후 샌드 웨지라는 이름을 갖게 됐고 퍼터나 드라이버처럼 골퍼의 필수 아이템이 됐다(사진). 그러나 바운스가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맞춤클럽 제작업체인 MFS의 전재홍 사장은 “짧은 거리에서 어프로치를 무조건 샌드 웨지로 하는 사람이 많은데 딱딱한 라이일 경우 바운스가 큰 클럽으로 스윙 하면 리딩에지보다 솔이 먼저 땅에 닿으면서 토핑을 낼 가능성이 커진다”고 말했다.

요즘 프로 선수들은 공이 그린을 벗어나면 “벙커에 들어가라”고 소리지르기도 한다. 벙커샷이 다른 러프에서의 샷보다 훨씬 쉽기 때문이다. 정상급 선수들에게 벙커는 더 이상 함정도 아니다. 20세기 최고의 플레이보이로 꼽히는 하워드 휴스와 사라센이 아니었다면 벙커의 고뇌는 줄어들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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