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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의 물러나는 정치, 율곡의 나아가는 정치 … 오늘 필요한 정치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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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퇴계 이황(왼쪽)과 율곡 이이(오른쪽). 현실 정치를 가능한 떠나려 했던 퇴계와 타계할 때까지 정치 현장을 떠나지 않았던 율곡은 여러 모로 대비되는 삶을 살았다.

퇴계 vs 율곡,
누가 진정한 정치가인가
김영두 지음, 역사의아침
288쪽, 1만3000원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과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조선왕조 600년 최고의 학자이자 정치가로 꼽히는 두 인물이다. 조선시대에 학문과 정치는 별개의 분야가 아니었다. 사대부 혹은 선비라 불리는 성리학자(주자학자)가 곧 정치의 주역이었다.

 정치가로서 퇴계와 율곡 중 누가 더 뛰어날까. 신간 『퇴계 vs 율곡, 누가 진정한 정치가인가』는 그런 궁금증에 도전한다. 두 성현 앞에 감히 불경(不敬)을 무릅쓰고 도발적 질문을 던졌다.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로 있는 김영두(44) 박사가 저자다.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를 낸 바 있는, 조선 중기 전공의 신예 연구자다.

 조선을 빛낸 두 거인은 잠시 겹치는 시대를 살았다. 첫 만남은 율곡이 퇴계를 찾아감으로써 이뤄졌다. 1558년(명종 13년) 2월, 퇴계 나이 58세, 율곡의 나이 23세 때였다. 도산서원에 은거하며 교육에 매진하던 퇴계의 명성이 이미 높을 때였다. 두 사람의 교류를 보여주는 시와 편지가 전한다. 율곡은 성리학의 정통을 계승한 사림(士林)의 큰 어른으로 퇴계를 받들었고, 퇴계는 율곡을 빼어난 능력을 가진 후배로 예우했다.

 이후 두 사람은 기회 있을 때마다 생각을 주고받는데, 주목할 만한 것은 율곡이 퇴계에게 현실 정치의 세계로 나오라고 계속 요청한다는 점이다. 두 사람의 삶은 대조적이다. 퇴계는 현실 정치를 가능한 떠나려 했다. 율곡은 관료이자 정치인으로 현장을 지키며 생을 마감했다,

 퇴계는 ‘물러나는 정치’를 했고, 율곡은 ‘나아가는 정치’를 했다. 두 정치를 어떻게 비교할까. 저자는 퇴계의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와 율곡의 ‘만언봉사(萬言封事)’를 분석했다. 두 인물의 대표적 상소(上疏·정책건의서)로 꼽히는 글들이다. 모두 선조 임금에 올린 상소라는 공통점이 있다. 퇴계의 글은 선조 즉위 직후인 무진년(1567년)에, 율곡의 상소는 그보다 6년 후(1573년, 선조 6년)에 작성됐다.

 비교의 초점은 그 내용이다. 퇴계는 성리학의 원칙에 충실했다. 왕통의 승계를 중시하며 인(仁)과 효(孝)를 온전하게 할 것, 성리학에 힘쓰며 다스림의 근본으로 삼을 것, 수양과 반성을 정성스럽게 수행할 것 등을 주문했다. 퇴계는 성리학의 핵심을 환기시키는데 주안점을 뒀다. 이에 비해 율곡은 제도와 법률의 문제를 건드린다. 세금을 모질게 거두는 해악을 없애라, 공노비들의 괴로움을 덜어주라, 군정을 개혁하여 안팎의 방비를 굳건히 하라는 등 구체적인 대책을 제시했다.

 저자는 ‘정책의 구체성’에 방점을 찍었다. 특히 그 시대에 법률과 제도의 개혁을 주장한 거의 유일한 인물로 율곡을 꼽았다. 일반적으로 주자학은 리더 개인의 도덕적 수신을 통해 좋은 정치가 자연스럽게 이뤄지길 기대한다.

 저자는 ‘현실 정치’라는 렌즈를 통해 율곡을 새롭게 부각시켰다. 그렇다고 퇴계를 낮춰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저자는 오히려 퇴계의 정치적 역할을 후대 사람들이 과소평가했다고 보는 편이다. 두 성현 사이에 서열을 정하는 일이 궁극적 목적은 아니다.

 조선시대를 대개 ‘훈구파(기득권 세력) vs 사림파(신진 개혁세력)’로 나눠보는 방식에 우리는 익숙하다. ‘훈구파=악’, ‘사림파=선’으로 보는 이분법인데, 퇴계가 주로 관직을 맡던 명종 시대는 선악이 구분됐던 시대라 할 수 있다. 문정왕후의 비호를 받는 외척이 권력을 쥔 정치판에 퇴계는 동참하길 꺼렸다. 퇴계에게 현실은 부정하고 싶은 대상이었다. 퇴계는 성리학 이념을 확립하는 정치를 했다. 반면 율곡이 주요 관직을 맡던 때는 사림이 득세했다. 율곡에게 현실은 부정이 아닌 개혁의 대상이었다. 정치의 조건이 달라진 시대에 정치가의 역할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 책을 통해 되새겨지는 질문이다.

배영대 기자

“퇴계가 이념적 바탕 깔아줘

율곡의 구체적 정책 나온 셈”

저자 김영두 박사

저자 김영두

-퇴계와 율곡에 대한 조선시대의 평가는 어땠나.

 “퇴계는 동인(東人), 서인(西人) 식으로 정파가 갈리기 이전의 인물이다. 당연히 모든 정파에 의해 추숭받았다. 율곡은 그렇지 못했다. 당파가 갈리는 걸 누구보다 반대했지만 결국 서인의 영수가 되고 말았다. 성현을 모시는 문묘에 들었다가 쫓겨났다가 다시 들어가는 곡절을 겪은 까닭도 거기에 있다. 나는 그런 평가에 얽메이지 않았다. 퇴계와 율곡이 남긴 글을 통해 두 사람의 정치관을 직접 비교해 보고 싶었다.”

-책을 보면 ‘현실 정치’라는 잣대로 율곡에게 판정승을 내린 듯한 느낌을 받는다.

 "정책의 구체성과 실현 능력에 있어 율곡이 탁월했던 것은 사실이다. 퇴계뿐 아니라 대개 사대부들은 이런 부문을 등한히 했다. 서리들에게 맡긴다고 할까. 율곡은 법률과 제도의 개혁을 줄기차게 주창했다. 대개 성리학자들은 개인의 수양을 통해 바른 정치를 실현하는 것을 이상으로 한다. 율곡은 한때 향약(鄕約)을 반대하는 주장을 한 적도 있다. 인의(仁義)를 가르치는 것보다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게하는 일이 더 시급하다고 본 것이다.”

-결국 율곡이 정치를 잘했다는 뜻 아닌가.

 "율곡이 구체적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던 이념적 바탕을 퇴계가 깔아준 점을 놓쳐선 안된다. 자부심이 남달랐던 율곡이지만 퇴계에 대해서만큼은 존경의 표현을 아끼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의 시대적 역할이 달랐다는 얘기인가.

 “조선 건국 이념인 성리학은 조선 중기에 전성기를 맞는다. 주자를 정통으로 절대화하고, 훈구 세력을 비판하며 사림파(士林派)를 조선 성리학의 주류로 보는 입장을 체계화한 사람이 바로 퇴계다. 율곡은 퇴계가 세운 성리학 체제 속에서 보다 구체적인 운영 방안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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