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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과 채소로 표현한 황제 얼굴은 풍요와 번영, 조화의 시대를 상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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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호 04면

1 ‘재판관’(1566) 캔버스에 유화, 스톡홀름 내셔널 뮤지엄 소장

바구니에 담긴 과일들이 볼과 코가 빨간 통통한 사람 얼굴로 보인 적이 있는지. 검은 그릇에 담겨 있는 양파와 무, 채소들이 모자 쓴 귀족으로 보인 적은? 현재 이탈리아 밀라노 팔라조 레알레(Palazzo Reale)에서 5월 22일까지 열리고 있는 전시회는 초상화라 해야 할지, 정물화라 해야 할지 모를 작품들로 가득하다. 바로 16세기의 천재작가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의 전시회다.

김성희의 유럽문화 통신: 주세페 아르침볼도 전시회, 5월 22일까지 이탈리아 밀라노 팔라조 레알레

1526년 이탈리아 밀라노의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 비아조와 함께 밀라노 두오모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하며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562년 페르디난드 1세의 부름을 받고 프라하로 이주한 아르침볼도는 1587년까지 25년 동안 프라하에 머물며 페르디난드 1세, 막시밀리안 2세, 루돌프 2세 등 합스부르크가의 궁정화가로 재직하게 된다. 그는 화가 겸 엔지니어로 궁정극장의 무대 배경, 초상화 등을 그렸고 1592년에는 백작 작위를 받았다.

2 미국 작가 필립 하스가 만들어 팔라조 레알레 광장에 설치한 ‘주세페 아르침볼도의 겨울’(2010)

이번 전시는 아르침볼도의 그림 감상은 물론 그가 활동했던 시대와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전시는 밀라노 암브로시오 뮤지엄이 소장하고 있는 보물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물 스케치와 다빈치 학교 학생들이 그린 인물 표정 스케치들로 시작한다. 계속해서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을 식기나 칼자루, 손잡이 등에 사용한 오브제 컬렉션으로 이어졌다.

아르침볼도가 정밀하게 그린 식물·동물도감이 동식물 표본과 함께 전시된 다음 방으로 가면 그제야 프라하 궁중도서관에 있는 해괴하고 진기한 동식물 박제가 이해가 된다. 합스부르크가 왕들이 유럽 각지를 돌며 수집한 자연의 일부분을 아르침볼도는 백과사전처럼 그림으로 섬세하게 그렸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프라하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였다. 자신이 그렸던 모든 대상에 대해 과학자 못지않은 해박한 지식이 있었다.

그는 여러 물체를 한데 섞어 전혀 다른 새로운 물체처럼 보이는 이중그림(게슈탈트·Gestalt)을 개발해 냈다. 그 기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것이 사계절 시리즈다. 아르침볼도를 유명하게 만든 사계절 시리즈는 페르디난드 1세의 뒤를 이은 막시밀리안 2세를 위해 그린 것이다. 그는 유년기·청년기·장년기·노년기라는 인생의 네 단계를 1555년부터 1573년 사이 세 차례에 걸쳐 같은 형태, 다른 가장자리 무늬로 그렸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마드리드의 산페르난도 예술아카데미, 뮌헨의 바이에른 주립미술관, 빈의 쿤스트 히스토리 뮤지엄 등에 흩어져 있는 세 가지 버전의 사계절 시리즈가 이번 전시회를 통해 한자리에 모였다.

그는 생명이 만개하는 봄은 싱그러운 녹색과 활짝 핀 꽃들로, 싱싱함을 자랑하는 여름은 계절의 과일로, 수확의 계절인 가을은 풍요로운 곡식과 채소·단풍잎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계절의 마지막인 추운 겨울은 앙상하게 남은 나뭇가지와 뿌리, 버섯 등으로 구성해 두상을 그렸다. 세 번 다 같은 구성으로 그린 똑같은 두상이지만 잘 보면 옷처럼 두른 멍석은 조금씩 다르다. 아르침볼도는 그중 1573년에 그린 ‘여름’에 자신의 서명을 하는 대신 멍석 무늬를 짠 것처럼 자신의 이름과 제작연도를 그림의 일부분으로 삽입하기도 했다.

물과 불을 주제로 그린 그림도 재미있다. ‘물’이라는 제목의 그림은 물에 사는 생물들(조개, 소라, 각종 물고기, 새우, 문어 등)로 완벽히 구성된 사람의 얼굴에 물에서 얻을 수 있는 보석인 산호와 진주로 치장했다. 불 주제의 그림은 불이 활활 타오르는 장작으로 만든 머리카락·촛불·불로 녹여 만든 금속 제품들과 주얼리를 적절한 장소에 삽입해 만들어진 인간의 실루엣이다. 쌓고 기댄 책으로만 그린 궁정사서 볼프강 라지우스의 초상은 인물사진의 대가였던 요셉 카시의 사진처럼 제목을 읽지 않아도 주인공의 직업을 한번에 알아맞힐 수 있다. 이들은 16세기의 작품이라고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방가르드적이다.

1591년에 그린 루돌프 2세의 얼굴은 황제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하기는커녕 웃음을 자아낸다. 유머가 없는 왕이었다면 당장 교수형을 시켰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루돌프 2세는 과일과 채소로 표현한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박장대소하며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왕을 웃기려고 이 그림을 그렸을까? 아니다. 황제의 얼굴을 그리는 데 사용된 포도·호박·복숭아·사과·배·앵두·밀·당근·온갖 꽃 등은 황제가 나라를 잘 다스린 결과인 풍요와 번영, 조화를 뜻한다. 아르침볼도는 그것을 의인화해 국민에게 홍보한 것이다. 신문이나 홍보 매체가 없었던 당시에는 그림이 가장 좋은 홍보물이었다.

풍자적이고 해학적인 아르침볼도의 그림은 당시 사람들에겐 인기가 있었지만 시대를 앞서갔기 때문인지 17세기 이후부터 품격 없고 그로테스크한 그림으로 평가절하되면서 먼지구덩이 속에 처박혀 빛을 보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20세기 들어서야 그의 작품들은 마르셀 뒤샹이나 살바도르 달리 등에게 많은 영감을 주면서 초현실주의의 융성과 더불어 재평가됐다. 서랍이 달린 비너스의 몸이나 커튼과 가구가 있는 방을 멀리서 보면 여자의 얼굴이 되는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은 방법은 달랐다 하더라도 아르침볼도의 영향을 받은 게 분명하다 할 수 있다.

1937년 앨프리드 바가 기획한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환상적인 미술, 다다, 초현실주의’ 전시는 아르침볼도를 다다와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준 천재화가로 재조명했다. 그의 작품들은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번 전시에는 미국 작가 필립 하스가 겨울을 주제로 만든 대형 설치물이 팔라조 레알레 뮤지엄 광장에 전시 중이다.

반 고흐가 살아생전 무명화가로 활동하다 사후에 유명세를 얻은 화가라면 아르침볼도는 살아생전 유명세를 누리다 죽어서 육신과 이름이 함께 사라져 버린 작가였다. 하지만 때늦은 부활도 있는 법. 그의 천재성과 미술성은 그가 떠난 지 4세기가 지난 오늘, 초등학생들까지 알 정도로 전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다.


김성희씨는 밀라노를 무대로 활약 중인 보석디자이너다. 유럽을 돌며 각종 공연과 전시를 보는 게 취미이자 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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