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105)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돌아눕는 뼈 5

“보살님은 못 가세요. 백주사님 불러드리거나, 제가 택시로 모실게요.”
“백주사님껜 아저씨랑 걸어가겠다고 이미 말씀드려놨어요. 택시는 노땡큐고요. 아저씨 평소 다니는 길로 따라 가게 해주세요. 줄로 제 허리를 묶어 잡고 앞장서 가주면 따라갈 수 있어요. 꽃구경하고 싶어 그래요.”
“글쎄, 그건 안 된다니까요!”
“돼요. 이래봬도 내가 얼마나 산을 잘 타는데요.”
아무리 말려봐도 소용없었다. 그녀는 이미 단단히 결심하고 내려온 눈치였다. 산을 잘 탄다는 그녀의 말은 사실이기도 했다. 열네 살 시절의 그녀는 육십 도 가까운 암벽까지 고양이처럼 가볍게 잰걸음으로 올라 다녔다. 명안진사로 내려가는 마지막 암벽구간만 우회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백주사에게 미리 허락을 얻어두었다니 따로 신경 쓸 일도 없었다. 결국 로프로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묶어 잡고 내가 이삼 미터 앞장서 걷기로 했다.

“산에 들어오니 너무 좋아요!”
뒤뜰을 나서자 그녀가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관음봉의 허리를 돌아가는 어프로치(Approach) 코스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많이 오르내리는 길이라서 평탄했고 경사 또한 완만한 편이었다. 그녀는 로프에 의지하지 않고 지팡이로 길을 고르면서 자연스럽게 걸었다. 철쭉이 천지사방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길은 있다 하지만 개울을 넘기 위해선 바위옹두라지가 솟은 된비알을 조금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부턴 비탈이 좀 심해요.”
“알아요. 여기 어디, 큰 소나무 있지요?”
“어떻게 그걸…….”
“예전에 많이 다녀본 길인걸요. 앞을 봤을 때요.”

그녀가 그 소나무 밑에 앉았다. 맞은편 능선을 비켜, 도시의 서쪽을 휘돌아 흐르는 강의 한켠까지 아스라이 눈에 들어오는 돌출 지점이었다. 열네 살의 그녀와 관음봉 정상에 오르내릴 때에 늘 앉아서 쉬던 곳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녀도 나처럼, 지금 기억의 물레를 돌리며 걷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기억 속에는 청년의 모습을 한 나도 깃들어 있을 터였다. 그녀가 서기를 띤 표정으로 손차양을 하고서 멀리 강 쪽을 바라보았다. 가파른 숨을 따라 봉곳한 그녀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고, 목덜미의 힘줄은 V 라인으로 솟아 있었으며, 이마는 희고, 뺨은 서기로 붉었다. 그녀가 여전히, 부식되지 않은 열네 살의 청정한 시간 속에, 현재진행형으로 놓여 있다고 나는 느꼈다.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특히 이사 오던 첫날, 한손으로는 노란 허브 꽃 화분을 들고 다른 한손으로는 손차양을 한 채, 가을빛 찬란한 숲을 찡그린 듯 바라보고 있던 어린 그녀가 오버랩되어 자꾸 떠올랐다.

“여기선 강이 아름답게 보였는데, 지금도 그렇지요?”
“뭐 아지랑이가 펴서요, 지금은요, 강이 잘 안 보이는데요.”
“풋, 내 눈엔 지금도 보이는데…….”
예전의 그녀처럼 해맑게, 그녀는 웃었고 나는 침묵했다.
그곳에서 개울까지는 삼, 사십여 미터밖에 되지 않는 구간이었지만 하강코스인데다가 경사가 급해 앞이 보이지 않는 그녀로서는 지팡이에 의지해서 내려가기에 무리가 따를 것이었다. “여기 앉아 있어요. 로프를 맬게요.” 한참 만에 내가 말하고 일어섰다. 가지고 온 로프는 충분한 길이였다. 나는 그녀가 잡고 내려갈 수 있도록 짊어지고 온 긴 로프를 풀어 개울까지 재빨리 설치했다. “예전에, 어떤 오빠는 손을 잡아줬는데…….”

그녀가 입술을 내밀며 말했고, “내려가는 길은 손잡는 게 오히려 위험해요!” 예전의 ‘어떤 오빠’였던, 내가 대꾸했다. “말투가 왜 그리 무뚝뚝해요? 전엔 아저씨, 부드러웠었는데요.” 지팡이를 아래로 던지고 두 손으로 로프를 잡은 그녀는 거의 정상인처럼 빠르게 된비알을 내려왔다. 물이 쫄쫄쫄 흘렀다. 그녀가 장갑을 벗고 개울물에 손을 적셨다. 심해어의 지느러미 같은 흰 손등 위로 푸르스름하게 흐르는 정맥이 눈에 들어왔다. 산에 오를 때마다 자주 잡아주었던 그 손이었다. 손바닥 안의 말굽이 쓰윽 솟구치려다가 가만히 내려앉고 있었다.
“개울은 얼마나 넓어요?”
“물이 흐르는 자리는 일 미터도 안돼요. 그냥 건너뛰면 돼요.”
“손을 잡아주세요.”
그녀가 앞으로 맨손을 내밀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