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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시대의 스파이 전쟁 되살아났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몇 달 동안 스타니슬라프 보리소비치 구세프에겐 더 좋은 주차장소를 찾아다니는 일이 인생 최대의 고민인 듯했다. 러시아 '외교관'인 그는 늘 워싱턴의 이곳 저곳으로 차를 이동시켰다. 美 연방수사국(FBI)
의 호기심을 부추긴 것은 그가 주차하려는 장소가 항상 국무부 청사 주변이라는 점이었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구세프가 가장 좋아했던 위치는 매들린 올브라이트 美 국무장관의 집무실이 있는 국무부 7층이었다. 이곳은 몇 달 전부터 숨겨둔 초정밀 도청장치의 전송신호를 받기에 가장 좋은 위치였다. 구세프는 러시아 스파이였다. 그는 대담하게도 美 외교의 안방까지 쳐들어와 상당기간 재미를 본 침투작전의 첨병이었던 것이다. 지난주 수요일 FBI에 의해 체포된 그는 오는 19일 모스크바로 추방될 것이다.

우방이든 적국이든 각국은 서로 염탐한다. 늘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96년 보리스 옐친이 공산주의자들을 쓰러뜨렸을 때 모두들 기대했듯이 새 러시아가 지금과는 다르게 변했더라면 지난주 워싱턴에서 벌어진 스파이 사건은 의례적 사과와 함께 마무리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다. 러시아는 현재 미국에서 냉전시대에 버금가는 첩보활동을 벌이고 있고, 그만큼 양국의 언성도 높아지고 있다.

FBI가 구세프를 체포한 다음날, 91년 쿠데타를 저지하게 위해 탱크에 올라탔던, 미국이 좋아하던 그 보리스 옐친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잔뜩 성난 호전적 모습으로 베이징(北京)
에 날아가 중국·러시아 양국의 노골적 메시지를 빌 클린턴 美 대통령에게 전했다. 호주머니에 핵무기를 갖고 있는 나라가 미국만은 아니라는 위협이었다.

2000년을 코앞에 두고 미국의 최대 위협은 교내 총기사건 같은 국내문제여야지 멀리 떨어진 곳의 핵미사일은 아니어야 했다. 국외의 위협이란 것도 전과는 달리 사소한 것이라야 했다. 정신나간 짓을 하지 않도록 견제해야 하는 이라크나 북한 같은 못된 나라 정도로 간주됐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주 옐친 대통령이 폭언을 하는가 하면, 미국과 계속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신흥 강대국 중국을 방문해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과 포옹한 모습은 그런 전제들의 뿌리를 뒤흔들었다.

클린턴이 러시아의 체첸문제 처리에 대해 비판의 수위를 전에 없이 높이자 옐친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클린턴은 "러시아는 체첸에서 저지른 행위에 대해 큰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 대해 옐친은 마치 흐루시초프의 망령이 되살아난 듯한 반응을 보였다. 옐친은 한때 절친한 사이였던 클린턴을 향해 이렇게 입을 열었다. "아마 그는 잊고 있는 모양인데 러시아의 병기고에는 핵무기가 가득하다."

베이징의 공산당 지도자 장쩌민은 옐친과 어깨동무를 하며 러시아의 무자비한 체첸 진압에 대해 전폭 지지를 표명했다. 공교롭게도 미국은 다음날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의 화교 과학자 리원허(李文和)
를 고위 기밀정보 불법유출 혐의로 기소했다. 李는 스파이 혐의로 기소되지는 않았지만 기소장은 그가 "타국의 이득을 확보하려는 의도로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의 컴퓨터에서 민감한 정보를 빼냈다"고 주장했다.

냉전시대가 되돌아온 듯 지난주엔 치고받기식 보복 분위기가 명백했다. 이제 배부르고 편한 입장의 미국이 갖는 의문은 이런 상태가 지속될 것인가 하는 점인데 아마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리원허가 좀더 광범위하고 피해가 큰 중국측 첩보활동의 일원이었다는 것을 검찰이 입증하면 중국과의 관계는 악화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지난 봄 베오그라드의 중국 대사관 폭격사건 이후 양국 관계를 안정시키려는 조용한 시도의 일환으로 중국을 세계무역기구(WTO)
에 초대한 것이 바로 얼마 전의 일이다.

또 러시아는 옐친의 허세에도 불구하고 하루가 다르게 낡아가는 핵무기만으로 명맥을 유지하는 '강대국'이며 갈수록 상황이 어려워지고 있다. 지난주 클린턴 정부의 한 고위관리는 "내가 생각하는 냉전 분위기란 베를린 문제로 핵전쟁 직전까지 갔던 것 같은 상황이다. 예전에는 정말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순간들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옳은 지적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체첸에서 보여주는 러시아군의 무시무시한 행위처럼 보리스 옐친 시대는 결코 미국이 기대한 방향으로 마무리되고 있지 않다. 96년의 러시아 선거에선 단연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화두였고 그때는 모든 것이 가능할 것 같았다. 모스크바의 갓 민영화된 경제는 성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클린턴은 툭하면 미국과 러시아를 동반자라고 불렀다. 美 정부는 야심 찬 군축(軍縮)
의제를 추진했다. 한 가지 조약이 비준되면 이어 또다시 양국의 군사력을 대폭 삭감하는 쪽으로 추진했던 것이다.

그것이 지금은 아주 오래전의 일 같다. 클린턴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의 팽창을 주장함으로써 러시아에 대한 자신의 수사적(修辭的)
지지를 뿌리부터 흔들었다. 스트로브 탤벗 국무부 부장관 같은 정부인사가 ‘NATO의 팽창 의도는 러시아의 견제’라는 러시아인들의 공포를 누그러뜨리려고 아무리 애써도 러시아 국민들이 볼 때 그 의도는 명백했다. 미국은 말로는 러시아가 동반자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적처럼 다룬다는 것이었다. 러시아의 경제붕괴도 실은 국내의 부정부패와 실책들로 인한 것이지만 그런 불신을 부채질하는 요인이 됐다. 많은 러시아인들 생각에 서방식 경제개혁은 그들이 과거에 보던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연줄이 좋은 크렘린 일당은 부자가 되고 나머지는 착취를 당하는 것이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러시아도 지금 한창 정치의 계절이다. 12월 19일 총선에 이어 옐친의 다음을 노리는 대권 주자들이 6개월간 각축을 벌일 것이다. 양국 간의 최근史를 보건대 러시아 정부가 지금 체첸 사태와 관련해 미국의 항의를 무시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3개월 전에는 옐친 반대진영에서 차기 대통령이 나올 듯한 분위기였다. 크렘린에서는 옐친과 그 측근들의 부정부패 혐의에 대한 차기 정권의 책임 추궁 가능성이 큰 골칫거리로 대두됐다. 현재 러시아 정부 비판세력은 정부가 親옐친 후보를 차기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체첸 사태를 획책했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런 속셈이었다면 결과는 성공적이다. 체첸 분쟁이 3개월째 접어들면서 실의에 빠진 국민들은 강경한 군사정책을 구사하는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를 강력 지지한다. 지난주 러시아는 체첸 수도 그로즈니의 재탈환을 목전에 둔 것 같았다. 러시아군은 지난주 화요일 반군의 주요거점인 우루스-마르탄에 10시간 동안 포격을 퍼부은 뒤 특공대와 공수부대를 진격시켰다. 목격자들은 "참호에 체첸군 병사들의 시신이 즐비했다"고 진술했다.

미국으로선 러시아의 현 체첸 정책에 대한 대응방식이 현안이 돼 있다. 조지 W. 부시 공화당 후보 등 클린턴 정부 비판자들은 만행이 종식되지 않는 한 러시아에 대한 원조 일체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부 관리들은 그런 주장을 불안하게 받아들였다. 예컨대 논란의 여지는 있겠지만 체첸 사태보다 더 중요한 양국 간 의제들, 특히 미국이 성사시키려는 군축협약 등이 이미 곤란을 겪고 있는 시점에서 원조 중단은 러시아를 더욱 자극하리라는 것이다.

지난주 끝무렵에는 양측이 목소리를 낮췄다. 푸틴은 러시아는 고립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고, 미국 정부 관리들은 사석에서 러시아에 대한 IMF 추가지원 문제가 잘 진척되기 바란다고 거듭 말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체첸 분쟁이 곪을 대로 곪은 러시아病의 출혈 증세일 뿐이라는 것이다.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쇠퇴의 길에 접어든 자존심이 매우 강한 왕년의 제국이다. 보리스 옐친의 후계자가 서방세계의 건설적 원조에 힘입어 어떻게든 그 몰락을 저지하지 못하는 한 큰 혼란이 초래될 것이다. 그것이 빌 클린턴의 후임자를 기다리고 있는 숙제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냉전은 아니겠지만 매우 위험천만할 것이다.

Bill Powell 모스크바 지국장
뉴스위크한국판(http://nwk.joongang.co.kr) 제 409호 1999.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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