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새천년 도전현장] 국가 사활걸고 '꿈의 기술'개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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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 빛보다 1백만배나 강한 엑스선이 만들어지는 곳. 포항 방사광가속기연구소에는 낮과 밤이 따로 없다.

일요일인 19일 새벽 ''5C2 허치'' . 밤을 새운 강현철 연구원(광주과학기술원) 이 나른한 몸을 이끌고 옆의 간이침대로 향한다.

김도형 연구원은 "둘이서 12시간씩 교대로 실험실을 지킨다" 며 "지난 6개월간 이런 식으로 일해왔다" 고 말했다.

다섯평 남짓한 허치는 신기술의 산실. 허치는 가속기가 만들어낸 엑스선이 최종적으로 다다르는 공간으로 각종 실험이 이곳에서 이뤄진다.

강현철.김도형 연구원팀은 ''알루미늄 나이트라이드'' 라 불리는 미래 광(光) 소자 관련 물질의 물성을 연구하고 있다.

金연구원은 "가속기 덕택에 알루미늄 나이트라이드를 원자 수준에서 보고 분석할 수 있게 됐다" 고 했다.

국내 최대(둘레 2백80m) .최고가(1천4백90억원) 의 실험시설인 포항 방사광가속기가 21세기 기술 도약대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94년말 완공 이후 운영경비 부족에 국제통화기금(IMF) 타격까지 겹쳐 위축 일로를 걷던 가속기 연구가 최근 활기를 되찾기 시작한 것이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은 최근 광주과기원의 허치 바로 옆에 새 허치를 만들고 있다.
내년 초반 개설될 이 허치에서 세브란스병원은 암세포의 성장과정을 분석, 암치료의 새 장을 연다는 계획이다.

포항산업과학연구원 역시 고급 철강 개발을 위해 내년 상반기 가동을 목표로 역시 허치를 마련하고 있다.

21세기 주역을 자처하는 연구소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20일 대덕단지 내 기초과학연구소. 대형 덤프트럭과 중장비들이 굉음을 내며 작업에 열중이다.
국내 최초의 핵융합장치 건설이 이뤄지는 현장이다.

핵융합 프로젝트 책임자인 이 연구소 이경수 박사는 "IMF로 정말 혹독한 경험을 했다" 며 "그러나 시련을 견뎌낸 만큼 더욱 강한 연구체제를 갖출 수 있게 됐다" 고 말했다.

핵융합 프로젝트는 이 연구소를 비롯해 서울대.한국전력.삼성전자 등 국내 18개 기관이 연합으로 추진하는 산학연 사업. 핵융합 연구개발은 국내에는 생소한 분야로 외국 의존도가 커 외환위기로 한때 프로젝트 중단설까지 나돌기도 했다.

그러나 기술 수입을 최대한 억제하고 자력 개발을 강화해 활로를 텄다.
최근 이 연구소가 한국항공우주산업㈜과 공동개발한 탄소복합재료가 한 예다.
이 신소재는 섭씨 2천도 이상의 고온을 견딜 수 있는 것은 물론 3천도까지는 온도가 높아질수록 강도가 증가, 미 국립 샌디아 연구소로부터 ''세계 최고 수준'' 이라는 공인까지 받았다.

기초과학연구소 건너편의 생명공학연구소. 3백명 안팎의 연구원으로 미생물.화초에서부터 젖소까지 백화점식으로 찔끔찔끔 손대오던 연구방향을 대폭 개선키로 했다.

이 연구소 복성해 소장은 "생명공학연구는 정보통신과 함께 21세기를 이끌 대표적인 분야다.
그러나 제한된 예산과 인원으로 모든 연구를 다 잘하기는 힘들다" 며 "새해부터는 유전자 연구에 힘을 모을 생각" 이라고 말했다.

기업이나 대학에 넘길 것은 과감히 넘기고 큰 돈이 들어가는 원천기술 개발에 주력한다는 것.
일부에서 세금만 축냈지 이렇다할 연구결과가 없다는 비난을 받아온 대덕단지의 연구소들이 최근 변신의 몸부림을 치고 있다.

한국항공우주연구소 최동환 소장은 "민간기업이 할 수 있는 상용기 개발은 포기하고 선미익기 등 새 개념의 고부가 가치 항공기 개발에 역점을 둘 것" 이라고 말했다.

대덕단지의 이런 변화는 최근 국회에서 개정된 대덕연구단지관리법이 통과됨으로써 가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이로써 그간 교육.연구기관 외에 들어설 수 없었던 벤처기업 같은 산업체가 단지 내에 발을 붙일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는 최근 매년 1조원 이상이 투자되는 대덕단지를 ''첨단과학산업특구'' 로 탈바꿈시켜야 한다고 대통령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자문회의 김훈철 박사는 "인력과 실험장비 등 대덕단지의 기반시설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크게 뒤지지 않는 수준" 이라며 "구슬을 잘 꿰는 것이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 라고 말했다.

기업들의 연구개발 풍토는 출연연에 앞서 변하고 있다.
최근 삼성종합기술원.LG종합기술원.대우고등기술원 등 국내 ''빅3'' 기업 부설 연구 책임자들은 어느 때보다 잦은 접촉을 갖고 있다.

손욱 삼성종합기술원장은 "기술개발은 기업간의 단순한 경쟁관계만은 아니다" 며 "3개 연구소의 공통 개발과제는 공동연구해 성과를 나눠 갖기로 했다" 고 밝혔다.
인력.자금력이 풍부한 미국 기업에 합심해 대응하자는 뜻. 정부도 환영하고 나섰다.

과기부는 연합전선을 구축해 정부과제에 응모하는 기업연구소들에 대한 연구개발 자금 지원액을 계속 늘려갈 방침이다.

박사급 연구인력의 70%가 몰려있는 대학가에서 향후 10년은 죽느냐, 사느냐가 판가름나는 시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달 초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은 개원 이래 최대 폭의 인사를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실.과장 자리 15개 이상이 떨어져 나갔다.

"IMF도 끝나가는 분위기인데 너무 한 것 아니냐" 는 얘기가 학교 안팎에서 끊이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한 학교 관계자는 "변신을 늦추면 남는 것은 도태 뿐" 이라고 말했다.

KAIST는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이공계 최상급 대학. 그러나 다른 대학에서는 아직 이처럼 혹독한 제살깎기 노력은 눈에 띄지 않는다.
한국과학재단 P부장은 "대학간 연구비 나눠먹기 풍토 등은 최근 많이 개선되고 있다.
그러나 한번 교수는 영원한 교수라는 등식은 쉽사리 깨지지 않는 것 같다" 고 말했다.

서울대 오세정 교수는 "대학은 경쟁체제 도입, 기업은 장기적 관점에서 핵심기술 개발, 출연연은 정부 간섭 탈피가 당면 과제" 라 전제하고 "하지만 과학기술의 저변이 넓어진 만큼 우리의 미래는 밝다" 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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