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100)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대화 8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말하고 싶으나 말이 나오지 않는다. 어색한 침묵이 한동안 계속된다. 바람이 불고 숲이 수런거린다. 차라리 명안전으로 달려 내려가, 나와 말굽이 정말 한 몸뚱어리냐고, 이사장에게 들이대 묻고 싶다. 이사장은 말굽의 관계를 명석한 분별력으로 판별하고 매듭을 지어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다. 내가 말굽이고 곧 나라니, 어불성설이다. 맹렬히 고개를 젓는다. 말굽은 다른, 명백한 외부이고 객체이다. 그렇게 소리쳐 그렇지만 말굽과 지금 다투고 싶지는 않다. 판결을 내릴 수 없다면 참는 게 낫다. 덕분에 머리만 아프다. 흔들어보기도 하고 이마를 짚어보기도 한다. 내려다보이는 발밑의 명안진사는 여전히 고요하다. 내가, 고요한 명안진사처럼 됐으면 좋겠다.>

나: <한숨을 쉬고> 지금은 너와 말싸움하고 싶지 않아.
말굽: 싸울 것도 없어. 우리는 절대 분리되지 않으니까.
나: <짜증난 목소리로> 말꼬리 잡지 마. 말이, 달리는 말이, 제일 싫어하는 다섯 놈이 있다는 말을 들었어. 들어봐. 첫째는 말꼬리 잡는 놈, 둘째는 말허리 끊는 놈, 셋째는 말 돌려 하는 놈, 넷째는 말 더듬는 놈, 다섯째는 이 말 저 말 하는 놈이야. 너 같은 놈. 웃기지?
말굽: 응. 웃겨!

<우습지 않지만 나와 말굽은 서로 마주 보고 동시에 웃는다. 말굽도 소모적인 이런 식의 싸움을 계속하고 싶지는 않은 눈치다. 이 말 저 할 건 없다. 손바닥의 모든 혈은 심장으로 거칠 것 없이 연결되어 있다. 다른 어디가 아니라, 바로 내 손바닥에 집을 짓고 들어와 앉았으니 미상불 말굽이 한 몸뚱어리가 됐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싸움은 계속 재연될 것이라고 나는 예감한다. 다만 지금은, 휴전이다. 하던 이야기의 아퀴를 짓는 게 우선이다.>

나: <힐끗, 말굽의 눈치를 보고 나서> 암튼…….
말굽: <키킥 웃고 장난을 걸듯이 흉내 내어> 암튼.
나: 말꼬리 잡지 말랬지. <나도 따라 웃고> 암튼, 샹그리라에 사는 젊은 순경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사장이, 아니 부대장이 예편한 것은, 여린의 집에 불이 나기 불과 반년쯤 전이었어. 주목되는 것은, 그가 예편 직전에, 국유지인 지금의 샹그리라 터를 불하받았다는 사실이야. 우리 집이 있던. 어떤 수를 썼는지는 모르지만, 그 땅을 수중에 넣고 나서 옷을 벗은 게 확실해. 문제는 샹그리라 터가 건축허가를 낼 수 없는 땅이었다는 것이었지. 지적도상 길이 없었거든. 그 땅을 효용성 있게 활용하려면 그 땅으로 이어진 여린의 집을 가져야 해. 그 집을 얻어야 길이 생기고 땅값도 몇 배로 뛸 테니까.

말굽: 기어코 이사장을 방화범으로 만들 작정이군.
나: 만드는 게 아냐. 이치가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 여린의 집에 불이 난 얼마 후 그는 그 집터를 손에 넣었어. 곧바로 형질변경의 허가를 얻었고. 많이 생각해봤어. 과연 느낌뿐일까.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가 여린을 업고 나왔을 때, 그애가 아버지를 소리쳐 부르는 바람에 다시 불 속으로 들어가려고 허리를 일으켜 세웠을 때, 분명히 누군가의 시선과 마주쳤었어. 단순히 느낌이 아니라고. 분명히 누군가의 눈빛과 마주쳤어. 상수리나무 밑, 억새풀 뒤에 은신한 채 이쪽 편을 살피고 있는 사람의 눈빛. 이글거리는 불꽃에 찰나적으로 비쳐든, 짐승 같은 그 눈빛. 확실해. 나는 보았어. 그 순간은 황망 중이라 지나쳤지만, 지금은 보여. 숨어 있는 자의 그 눈빛이 지문처럼 생생히 내 망막에 찍혀 있는 거.
말굽: 그랬더라도 그게 누구인지 알아볼 수는 없었겠지?
나: 그렇지만, 느낄 수는 있어. 화살 같은, 그런 눈빛을 가진 자는, 적어도 그 동네에서, 특수부대 교관들뿐이었거든. 특히 부대장의. 그의 눈빛은 보통사람의 그것과 달랐었어. 주말마다 보던 눈빛이니 내가 못 알아볼 리 없다고 봐. 개의 머리통을 박살내기 직전의 그 눈빛은, 절대로 흔하지 않아…….
말굽: …….

<말굽은 말이 없다. 나는 말굽이 무언으로 내 말에 동의했다고 느낀다. 별들이 관음봉 상단에서 기우뚱 기울어 있다. 수백 광년 전에 제 숙주를 떠났을지 모르는 먼 별빛이다. 별똥별이 하나, 명안전 등 뒤로 흐른다. 이마를 숙이고 두 개의 손바닥으로, 말굽으로 암벽을 짚는다. 말굽은 계속 묵언이다. 감각이 없기 때문이다. 손가락이나 지문만 달아나는 게 아니다. 손바닥에서, 심장에서, 모든 감각의 촉수가 빠르게 유실되고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 딱딱한 부드러운 것을 이미 느끼지 못한다. 영토를 넓혀감에 따라 팔과 어깨와 가슴도 곧 그렇게 될 것이다. 전신이 무기물로 바뀌고 나면 육체, 혹시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될까. 슬픔이 차올라 가슴이 뻐근하다. 슬픔은 내가 지켜온, 인간이라는 이름의 마지막 보루, 혹은 표상이다. 별은, 어쩌면 슬픔의 집일는지 모른다. 육체가 겨우 집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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