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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보호책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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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1994년 4월 6일 아프리카 중동부에 있는 르완다 상공에서 이 나라 대통령이 탄 항공기가 미사일에 격추됐다. 후투족 대통령의 피살은 종족 갈등으로 번지면서 투치족에 대한 피의 보복으로 이어졌다. 인구 700만 명에 불과한 르완다는 한반도의 10분의 1밖에 안 되는 소국(小國)으로 다수의 후투(85%)와 소수의 투치(15%)가 뒤섞여 있었다. 후투와 투치는 얼굴 생김새부터 생활문화에 이르기까지 서로 달라 반목과 대결의 역사를 반복해 왔다. 불과 100여 일 만에 후투족이 투치족 80만 명을 학살하는 ‘르완다 사태’가 벌어졌다. 98년 동유럽에선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알바니아계 코소보 주민과 세르비아 정부군 사이에 유혈 충돌이 발생했다. 세르비아가 알바니아계 주민들을 상대로 ‘인종청소’를 펼쳤다. 1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30만 명은 난민이 됐다. 두 사건은 가장 잔혹한 반인륜 범죄 중 하나로 기록됐다.

 지구촌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동안 국제사회는 무엇을 했나. 르완다와 코소보 사태는 국제사회에 충격과 함께 자성을 요구했다. 그 결과물이 2005년 9월 유엔 세계정상회의에서 채택된 ‘국민보호책임(Responsibility to Protect·R2P 또는 RtoP)’ 개념이다. “국제사회는 전쟁범죄, 대량학살, 반인륜적 범죄, 인종청소에 위협받는 개별 국가의 국민을 위해 평화적 수단이 통하지 않을 경우 집단적 무력 사용(Collective use of force)을 포함한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2008년 베를린 연설에서 “시의적절하고 단호한 조치”로 R2P의 범위를 구체화했다.

 미국·영국·프랑스 등 서방 연합군이 리비아 공습을 감행하면서 R2P를 내세웠다. 무아마르 카다피 최고지도자가 권력을 회복하면 대학살이 빚어진 르완다와 코소보의 악몽이 재현될 수 있다는 게 유엔의 판단이다. 인권을 유린해 온 세계의 독재자들은 리비아 사태를 가슴 졸이며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북한의 김정일도 그중 한 명이리라. ‘인도적 개입(Humanitarian intervention)’이란 명분을 꺼내들면 군사행동이 가능하다는 새로운 사실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리비아는 R2P의 첫 실험대상이었다. 처음은 어렵지만 두 번째부터는 쉬운 법이다. 3대 세습이라는 허망한 욕심이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

고대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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