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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형사 누명 벗겨달라’ 네티즌 청원 재수사 해보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올해 2월 ‘전직형사’라고 밝힌 유모씨는 누명을 벗겨 달라는 내용의 글을 다음 아고라 게시판에 올렸다. 강도를 붙잡은 자신이 폭행 피의자로 누명을 썼다는 것이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2007년 추석 때 술을 깨려고 남의 집 앞에 앉아 잠들었는데 누군가 내 지갑을 훔치려 했다. 현장에서 김모(당시 26세)씨를 잡아 강도미수범으로 신고했다. 그러나 김씨는 무혐의로 풀려났고, 오히려 내가 폭행 혐의로 입건돼 징계를 받았다.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목격자와 증거를 확보했고 김씨를 상해죄로 고소했는데 또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사표까지 냈다. 서울지방경찰청에 진정서를 접수했다.’

1만여 자에 가까운 호소였다. 이 사연은 네티즌 사이에서 부실수사로 지목됐고 경찰은 바로 재수사에 착수했다. 이로부터 한 달 뒤, 서울경찰청은 아고라 게시판에 재수사 결과를 올렸다. 제3자인 목격자들의 진술에 따라 ①김씨가 “아저씨 일어나세요, 이런 곳에서 주무시면 큰일나요”라고 말한 목소리를 들었다는 점 ②술 취한 유씨가 김씨의 양손을 붙잡고 이마와 무릎으로 수차례 때린 것을 본 점 ③유씨는 “김씨가 날 벽으로 밀쳤다”고 했지만 이를 본 목격자가 없다는 점, ④“술 취한 사람이 붙잡고 놔주지 않으니 떼어내 달라”고 김씨가 전화 신고를 한 점 등을 들었다. 서울경찰청은 “각종 의혹을 고려해 다시 수사했지만 최초와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수사과 이의조사팀 주진화 팀장은 “김씨는 전과가 없는 일반 사무직 종사자였고 당시 술을 거의 먹지 않은 상태였음을 확인했다”며 “몇 년 전에 끝난 일인데 재조사가 시작돼 김씨를 불러 거짓말탐지기 등의 조사를 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전화통화에서 “상대방의 입장을 알지도 못하면서 일방적인 주장의 글을 보고 욕하는 네티즌에게 화가 났다”며 “경찰에서 무혐의가 났는데 또 이 일로 불려가 조사를 받게 돼 마음고생이 너무 심했다”고 말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인 다음의 아고라가 ‘소통 창구’가 돼 경찰의 재수사를 끌어냈지만 사실과 다른 소문이 난무해 ‘인터넷 지상주의’의 폐해를 낳고 있다. 잘못된 정보로 되레 피해를 당한 이들이 피의자로 둔갑하는 것이다. 김씨도 유씨가 올린 글로 한 순간에 ‘죽일 놈’이 됐다.

올해 아고라에 올려진 재수사 요청 글은 5건 정도다. 이중 2월 초 ‘아침에 웃으며 나갔다 싸늘한 주검이 돼 돌아온 우리 딸’이라는 글도 논란이 됐었다. 신모씨의 어머니는 “딸이 성폭행에 저항하다 숨졌는데 경찰이 폭행치사 혐의만 적용했고, 피의자 중 한 명은 전직 경찰인 외삼촌이 손을 써서 무혐의 처리됐다”며 재수사를 요구했다. 서울경찰청 형사과는 이 사건을 전면 재수사했다 그러나 추가 혐의점이 없어 내사종결했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사라진 약혼자 김명철’편은 뒤늦은 경찰의 초동수사를 지적한 방송이었지만 네티즌은 “김씨의 약혼자가 의심스럽다”며 ‘김명철씨 실종사건 재수사를 촉구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나 김씨의 유가족이 “그녀도 힘들테니 재수사 글을 내려달라”고 요청한 일도 있었다. 현재는 고(故) 장자연씨의 수사를 ‘재재수사’ 하자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수사과 이의조사팀 주 팀장은 “재수사 전담팀 인원은 4~7명으로 구성되는데 이 일에 매달리면 다른 이들의 진정 건이 지연되거나 대민 수사 활동이 제약을 받을 수 있다”며 “사실관계가 와전돼 부작용이 생기거나 억울한 일을 두 번 겪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무분별한 재수사 요구를 방지하는 해결책으로 경찰이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최우선이라고 지적했다. “재수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네티즌은 대부분 “경찰을 못 믿겠다”는 이유를 들었기 때문이다.

경찰대 표창원 교수는 “경찰의 신뢰 부재가 제일 큰 문제점”이라며 “경찰 수사에 대한 민원ㆍ진정을 처리하는 독립기구를 만들면 경찰 행정력에 부담을 덜어주고 국민의 신뢰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뉴욕의 CCRB(Civilian Complaint Review Board) 시스템을 예로 들며 “일방적인 주장을 인터넷에 올려 재수사가 반복되면 수사가 부정되고 법질서를 위협받게 되니 객관적인 점검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표 교수는 또 “사실관계보다 여론에 호소하면 대중은 글쓴이에 동조하게 돼 있다”며 “집단 여론을 등에 업고 무조건 재수사를 해달라고 해선 안된다. 최초 수사와 달라지지 않는다면 무고죄나 명예훼손 등의 처벌이 함께 따라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울경찰청은 “수사과정을 상세히 설명하지 못해 오해의 소지가 생겼다면 앞으로는 더욱 신경쓰겠다”고 말했다.

이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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