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09) “조선은 바뀔 수 없는 혈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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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에 참전하기 위해 베이징을 떠나며 노모의 전송을 받는 철도 노동자 웨이즈제(魏志杰·위지걸). [김명호 제공]

저우언라이가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스탈린은 크리미아의 별장에서 휴양 중이었다. 저우는 린뱌오와 함께 스탈린이 있는 곳으로 갔다. 정치국원들을 대동하고 기다리던 스탈린이 운을 뗐다. “김일성의 용감한 모험은 실패했다. 남한에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이 많고 군사력도 우세하다고 큰소리쳤다. 나는 그의 말만 믿고 남침에 동의했다. 미군의 상륙작전으로 현재 위기에 처해 있다.”

스탈린은 소련의 참전이 불가능한 이유를 설명했다. “우리는 북한에서 병력을 철수한다고 이미 발표해 버렸다. 전쟁터에서 미군과 충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대신 공군을 동원해 엄호하겠다. 그것도 적 후방까지 들어가는 것은 곤란하다. 전투기 추락으로 조종사가 포로가 되거나 시신이 발견되면 국제적으로 파장이 크다.”

중국은 문제될 것이 없다면서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중국인과 조선인은 머리 색깔이 똑같고 생긴 게 비슷하다. 구분하기가 힘들다. 중국과 미국은 외교관계가 없다. 뭘 하건 행동이 자유롭다.” 이어서 “중국이 출병하면 소련은 의무를 다하겠다. 치타와 남부 지역에 비행기·대포·탱크·차량·총기·탄약 등을 운반해 놨다. 당장 동북으로 이동이 가능하다”며 종목, 수량, 전달 방법까지 설명했다. 통역을 위해 배석했던 스저(師哲·사철·마오쩌둥의 4대 비서 중 한 사람. 소련과의 연락을 도맡아 했다)는 후일 회고록에서 “스탈린은 소련과 북한 사이에 합의가 끝난 사항을 중국이 받아들이기만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저우언라이는 출병이 불가능한 이유를 장시간 설명했다. “중국인들은 오랜 세월을 전쟁의 고통에 시달렸다. 이제 겨우 회복과 건설이 시작됐다. 다시 전쟁에 뛰어들면 빈곤과 고통을 개선할 방법이 없다. 경제 건설은 입에 담을 수도 없다. 전쟁은 애들 유희가 아니다. 일단 발을 담그면 빠져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거둬들이기가 더 힘들다.”

스탈린은 시종 냉정하고 침착했다. “중국이 출병을 안 하면 북한은 길어야 5일에서 일주일밖에 버티지 못한다. 전몰당하느니 하루라도 빨리 철수시켜 후일을 기약하는 게 낫다. 소련은 북한과 접해 있는 구간이 짧다. 철수 병력 대부분이 중국의 동북 지역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
적들이 한반도를 점령하면 미군이 압록강 변에 포진한다. 공중에서 폭탄을 퍼부어대면 내륙은 그렇다 치더라도 동북은 편할 날이 하루도 없다. 그런 와중에 건설이 가능할지 의문”이라며 북한군을 한반도에서 철수시키는 문제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주력 부대와 무기, 물자, 간부들을 일단 동북으로 철수시키면 기회를 봐서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기에 유리하다. 노약자와 부상병들은 소련 경내로 들어오게 하자.” 린뱌오는 유격전에 관심이 많았다. 북한군을 한국의 산악지대에 분산시키자고 했다. 스탈린은 “폭이 좁고 길쭉한 지역이라 활동에 한계가 있다. 한 차례만 수색해도 소멸된다”며 묵살했다. 오후에 시작한 회의는 이튿날 새벽까지 계속됐다. 상대방의 의중을 탐색하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저우언라이가 소련으로 출발한 이틀 후 마오쩌둥은 참전을 결정했다. “많은 동지들이 출병을 반대한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을 치르는 동안 조선 인민과 당의 동지들은 우리의 혁명을 위해 피를 흘렸다. 조선은 수백, 수천 가지 이유를 들이대도 바뀔 수 없는 혈맹이다. 미국은 우리보다 대포가 많다. 그러나 역사는 대포로 쓰는 것이 아니다. 저들이 원자탄을 쓰면 우리는 수류탄으로 맞서자. 우리가 모른 체하면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던 길로 미국이 들어온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주먹 한 방 날려서 백 개가 날아오는 것을 면하자.”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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