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노트] ‘건축계 공익요원’ 정기용이 남긴 한마디 “고맙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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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숙 기자

11일 66세로 타계한 건축가 정기용(1945~2011) 선생의 별명은 ‘건축계의 공익요원’이다. 돈을 벌거나 이름을 남기는 설계보다 여럿이 함께 잘 살기 위한 집짓기에 열심이었다. 건축이 세상을 다 바꿀 수는 없지만 천천히 바꾸는 데는 한몫 할 수 있다는 신념을 자신의 건축물로 실천했다. 열이면 열 사람 다 불가능한 일이라 고개를 저었던 ‘기적의 도서관’을 기적처럼 전국에 퍼트렸다. 무주 구천동 어르신들을 위한 목욕탕과 공설운동장을 지으며 자연과 더불어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감응(感應)의 건축을 보여줬다.

 하루를 천년 같이 살던 그가 몇 년 전 건강검진을 받은 계기도 병원을 지으려면 병원을 잘 알아야겠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환자의 눈으로 병원을 살피겠다며 입원했던 그는 뜻밖에 스스로 ‘깊은 감기’라 이름 붙인 암 판정을 받았다. 일을 미뤄두지 못하는 고약한 성미의 그는 불량환자가 됐고, 기적의 완치를 간구했던 선후배와 제자들의 애통 속에 눈을 감았다.

 사위가 어둠에 잠겨있던 14일 아침, 대학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정기용 선생을 떠나 보내는 짧은 의식이 열렸다. 건축계와 문화계 사람들 200여 명이 모인 앞에서 그에게 건축을 배운 한 여학생이 목이 메어 ‘봄날은 간다’를 불렀다. 고인은 며칠 전 그가 이끌던 ‘기용 건축’ 식구들을 모두 불러 모아 아차산으로 봄나들이를 갔다고 한다. “봄내음 가득한 하늘을 보고 싶다”는 소원을 풀러 나간 그 자리에서 선생이 남긴 마지막 말씀은 ‘고맙습니다’는 한마디였다고 했다. “나무도 고맙고, 바람도 고맙고, 하늘도 고맙고, 공기도 고맙고,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이 말을 전하는 남학생의 흐느낌이 장내로 번져나갔다.

 정기용 선생은 건축이 왜 인문사회학이자 인간학이 돼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사람과 인생이 전제되지 않은 건축은 무의미하다고 가르쳤다. 인류 문명의 오만함이 제 풀에 무너지는 징후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오늘, “그 사회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열린 마음이 건축가의 근본”이라 했던 선생의 목소리가 벌써 그리워서 코끝 시큰하다. 16일부터 21일까지 서울 가회동 북촌미술관(02-741-2296)에서 열리는 ‘2011년 봄, 정기용을 응원하다’ 전시가 아쉬움을 잠시나마 덜어주려나.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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