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본 대지진] 진로재팬 일본인 직원들 비상연락하자 전원 응답하고 출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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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진 속에서도 ‘일본 주식회사’의 비즈니스 정신은 투철했다. 어디서나 고객과 거래처가 먼저였다. 근로자들은 누구나 자기 자리에서 침착하게 고객과 거래처를 챙기고 있다. 대지진 당시 일본 동북부의 거래처인 사케 공장들을 찾았다가 구사일생으로 귀환한 진로재팬 양인집(54) 대표 등을 통해 위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일본 비즈니스의 힘을 살펴본다.

“자신보다 거래처를 먼저 생각하는 일본 기업들 덕분에 위기를 넘겼다.”

 진로재팬 양인집(54·사진) 대표는 동일본 대지진을 몸으로 겪으면서 일본 비즈니스 세계의 저력을 또 한번 절감했다.

 양 대표는 일본에서 10여 년을 산 일본통이다. 2007년부터는 진로재팬의 대표를 맡아 왔다. 지난해엔 막걸리의 일본 진출을 주도해 현지에서 막걸리만 60만 상자 이상을 판매해 무역의날 기념식에서 산업포장을 받기도 했다.

 양 대표는 11일 오전 대지진 당시 도호쿠 지역 아키타(秋田)현 아키타시에 있는 다카시미즈(高淸水)의 공장 시설을 둘러보던 중이었다. 2008년부터 양 대표와 거래를 해오는 이 회사는 아키타 지역의 명물인 쌀로 사케를 빚는다. 양 대표는 1박2일 일정으로 인근 이와테와 미야기·후쿠시마 등의 거래처까지 함께 돌아볼 계획이었다.

 오후 3시가 넘어서자 갑작스레 공장이 크게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양 대표는 “일본에 오래 살았지만 그토록 땅이 심하게 흔들리는 느낌은 처음이었다”고 전했다. 진동과 굉음이 이어지면서 순식간에 전기가 끊겼다. 일부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제외하고는 통신도 끊겼다. 크고 작은 여진이 계속됐다. 지진이 이어지면서 공장 견학을 즉시 중단하고 밖으로 나왔다. 빨리 현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인근 아키타 공항으로 이동했다. 비행 편은 모두 취소됐다. 그는 하는 수 없이 근처 호텔로 갔다. 하지만 전기가 끊기면서 체크인 자체가 되지 않았다. 이미 해가 져 주변은 암흑천지였다.

 다시 공장 쪽으로 이동했다. 다카시미즈 측에선 흔쾌히 양 대표 일행이 머물 수 있도록 회의실 공간을 내줬다. 추위를 견디라며 난로도 넣어 줬다. 제대로 작동되는 난로는 세 대뿐이었다.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는데 다음 날 해가 밝기도 전인 오전 6시쯤 다카시미즈 대표가 부스스한 모습으로 촛불을 들고 양 대표 일행을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양 대표에게 줄 주먹밥 한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전기가 끊겨 공장의 주정 발효기 등이 멈춰서 연쇄 피해가 나는데도 손님부터 챙기러 온 것이었다. 그는 “우리 때문에 이런 일을 겪게 해 죄송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면서 “조금만 기다려 보면 차를 알아봐 주겠다”고 했다. 몇 시간 뒤 그는 버스와 기사를 데리고 다시 나타났다. 그는 기사에게 “도쿄까지 책임지고 모셔다 드리라”는 당부를 수십 번 했다. 양 대표가 탄 버스는 오후 2시쯤 아키타를 출발했다. 센다이와 후쿠시마 방면 도로가 폐쇄돼 일본 서해안 도로를 타고 내륙을 지나는 육로를 선택했다.

 위험은 계속됐다. 도로 곳곳이 파손된 데다 여진도 계속됐기 때문이다. 양 대표 일행이 탄 버스가 니가타를 지난 지 세 시간쯤 뒤엔 대형 강진이 니가타를 덮치기도 했다. 양 대표 일행이 도쿄에 도착한 것은 13일 0시30분쯤. 비행기로 1시간10분 거리를 버스를 타고 11시간 넘게 달린 끝에 도착한 것이었다.

 도쿄에서 양 대표는 다시 한번 감동했다. 100여 명의 진로재팬 직원이 대재앙 속에서도 자기 자리를 흔들림 없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직원들은 한국 주재원 7명을 제외하면 모두 일본인이다. 이들 대부분은 주말임에도 자진해 출근했다. 그러곤 전화기를 붙잡고 피해를 본 유통업체의 안부를 꼼꼼히 챙겼다. 진로재팬 배민호(41) 과장은 “비상연락망의 직원들이 단 한 명의 누락도 없이 응답할 만큼 직원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회사의 영업망 복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진로재팬은 위기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준 거래처와 일본 소비자들을 위한 다양한 구호대책을 마련 중이다. 진로재팬은 우선 피해가 가장 심한 센다이 지역에 생수 1만2000케이스(12만L)를 긴급히 보낼 계획이다. 추가 지원도 다각도로 준비하고 있다. 거래업체별로 피해 상황을 파악한 뒤 최대한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양 대표는 “진로재팬이 일본 희석식 소주 시장의 8%를 차지할 만큼 안정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자기 일처럼 뛰어준 일본 도·소매상 덕분”이라며 “지원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수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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