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건강한 당신] 만성 소화불량·기억력 감퇴 … 어르신, 우울증 아닐까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1면

[일러스트=강일구]


10년 전 중학교 교장으로 정년 퇴임한 신모(70·경기도 고양시)씨는 6개월 전부터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불면의 밤을 보내는가 하면 식욕부진으로 몸무게도 많이 줄었다. 당뇨병과 고혈압을 오래 앓아 건강이 좋지 않은데다 최근 장남의 사업 부도로 남은 퇴직금을 모두 넘겨준 터였다. 주변 친구의 영향도 컸다. 신씨는 ‘자살한 친구를 따라 나도 먼저 가는 게 마음 편하겠다’는 유서를 쓰고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다. 현재 그는 자식들의 권유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신씨의 주치의인 국민건강보험공단 일산병원 정신과 이병욱 교수는 “현재 약물 치료 4주차인데 우울·불면증이 80% 가량 줄고 식욕도 늘어 지금은 체중이 거의 회복됐다"고 말했다. 그는 얼마 전부터 건물관리 일도 나가는 등 증상이 많이 좋아졌다.

노인 우울증 환자가 급증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에 따르면 5년 새 노인우울증 환자는 1.7배 늘어 1만4772명이었다. 남자는 80~84세가 가장 많고 여자는 70~74세가 가장 많았다.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이동영 교수는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노인 자살률이 가장 높다. 우울증은 노인 자살의 가장 큰 원인이다. 치매나 뇌졸중 같은 다른 질환의 위험을 높이기도 하므로 반드시 예방, 조기 치료해야 하는 질환”이라고 말했다.

OECD 국가 중 노인 자살률 최고 … 5년새 노인 우울증 1.7배 늘어

우울증의 원인은 뇌에서 분비되는 세로토닌의 감소 때문. 노인 우울증도 다르지 않다. 세로토닌이 줄어드는 이유는 크게 네 가지다.

유전적으로 세로토닌이 적게 분비되기도 한다. 노년기에 많이 복용하는 혈압·당뇨병 치료제도 세로토닌량을 줄일 수 있다. 뇌혈관 문제도 있다. 뇌졸중을 앓고 난 뒤 또는 뇌혈관이 군데군데 막혀 있으면 세로토닌 분비량이 줄어든다. 마지막은 신체적 질환이다. 통증이 있는 질병을 오래 앓으면 이 통증 자체가 세로토닌 분비를 억제하기도 한다. 갑상선기능 저하증에 걸려도 세로토닌 함량이 낮아진다. 여기에 배우자와의 사별 , 경제적 위기 등 큰 충격이 있으면 우울증이 급격히 심해진다.

노인 우울증은 젊은층의 우울증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젊은층은 주로 ‘기분장애’만 나타나는 반면 노년층은 소화기질환 같은 신체증상이 함께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예컨대 ‘소화가 잘 안 된다’, ‘등이 뜨겁다’, ‘입이 마른다’, ‘어지럽다’, ‘목에 뭐가 걸린듯한 느낌이다’ 등의 신체적 증상을 호소한다. 이동영 교수는 “노인 우울증 환자는 신체적 증상 때문에 다른 병으로 오인하다 마지막에 정신과를 찾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두 번째는 인지기능(기억력·집중력)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체내 세로토닌 함량이 떨어지면 뇌신경 사이 물질 교환능력도 떨어진다. 우울증이 기억력의 핵심 역할을 하는 뇌 해마부위를 작게 만든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노인은 젊은 사람에 비해 뇌 신경물질이나 신경돌기가 줄어든 상태이기 때문에 우울증에 의한 인지기능 저하 정도가 확연하게 나타난다.

그밖에 지나친 건강염려증·질투·피해망상·죄책감·불면증도 젊은층 우울증 환자에 비해 많이 나타난다.

노인우울증은 여성이 더 많다는 것도 특징이다. 건보공단의 조사 결과, 여성 노인 우울증 환자가 남성에 비해 2.4배 더 많았다. 이병욱 교수는 “여성이 노년기에 세로토닌 감소 정도가 더 큰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여성이 남성보다 체내 호르몬 변동 정도가 크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햇빛 받으며 걷기 운동 … 세로토닌 양 늘려야

우울증은 주로 약물치료를 한다. 이동영 교수는 “약물의 질이 지금처럼 좋지 않았던 20~30년 전에는 우울증 환자에게도 정신분열증 약물을 써서 망상 등의 부작용이 있었다. 이 때문에 ‘약을 먹기 시작하면 바보가 된다’, ‘한번 약물을 복용하면 죽을 때까지 먹어야 한다’고 생각해 지금도 약물치료를 거부하는 사람이 꽤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 우울증 치료제는 감소한 세로토닌 양을 정상화시켜주는 약물이 대부분이다. 이동영 교수는 “당뇨병 치료에 인슐린 호르몬이 잘 생성되는 약물을 쓰듯 우울증도 떨어진 세로토닌 함량을 높여주는 약물을 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가족들은 부모님의 우울증을 나약한 성격이나 의지 탓으로 보면 안 되며, 치료 가능한 ‘질환’으로 보고 조기 치료를 받도록 권유해야 한다”고 말했다.

초기 우울증이라면 약을 먹는 즉시 우울증이 개선되며, 4주 정도면 효과를 볼 수 있다. 단, 세로토닌 분비를 계속 유지하고, 재발을 막기 위해 6개월 정도는 꾸준히 약물을 복용해야 한다. 최근에는 세로토닌도 늘리고 통증이나 소화불량 등의 신체적 증상도 완화시켜주는 약물도 개발됐다. 일찍 치료할수록 치료기간이 단축되며 재발이 적다.

운동도 많은 도움이 된다. 혈액순환을 잘되게 해 뇌로 가는 혈류를 상승시켜 결국 세로토닌 분비를 늘린다. 햇볕 밝은 곳에서 하루 30분 정도의 걷기가 적당하다. 뇌혈관이나 갑상선에 문제가 있으면 해당 질환을 치료하면 우울증이 개선된다.

글=배지영 기자
일러스트=강일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