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관시’의 저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한우덕
중국연구소 부장대우

관시. ‘관계(關係)’의 중국어 발음이다. 언제부터인가 이 말이 우리 주변에서 흔히 쓰이기 시작했다. ‘영향력 있는 사람과의 인적 관계’라는 뜻이다. 중국과의 비즈니스가 넓어지면서 이 중국어가 자연스럽게 우리말 영역으로 넘어온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건 ‘인맥’은 중요하다. 구청 민원서류 한 장을 떼더라도 아는 사람이 있으면 수월한 법이다. 미국에서 비즈니스를 하더라도 우선 인맥을 찾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중국에서 유독 ‘관시’가 강조되는 것은 중국 사회가 아직 불투명하고, 행정처리 등에 있어 법치(法治)보다는 인치(人治)적 요소가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 사업 하면서 ‘관시, 관시’ 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관시는 과연 만능인가. 건설업체 상하이 지사장으로 활동하다가 독립한 김모(46) 사장의 경험담이다. 그는 3년 전 상하이에서 아파트 건설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 한 중국인을 알게 됐다. 거물처럼 보였다. 상하이와 이웃 장쑤(江蘇)성 지도자와의 ‘관시’를 들먹이며 자문해주겠다고 접근했다. 중국의 높은 장벽에 막혀 고전하고 있던 그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고문 계약을 체결했다. 한동안 잘나가는 듯했다. 토지 매입도 성공했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인허가 절차에 들어가면서 그의 능력에는 한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고문은 ‘사람을 더 움직여야 한다’며 돈을 요구했다. 어쩔 수 없었다. 건설사업이 시작된 이상 시간은 곧 돈이었다. 그렇게 4개월 정도 끌려다녔지만, 프로젝트는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김 사장은 “나중에 안 일이지만 원래부터 개발될 수 없었던 땅이었다”며 “왜 직접 오지 않았느냐는 시정부 관계자의 핀잔만 들었다”고 말했다. 이제 상하이 현지 비즈니스맨들은 ‘관시’에 의존한 비즈니스는 허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직원들의 능력과 기업의 경쟁력이 우선이고, ‘관시’는 그 다음이라는 얘기다. 준비되지 않은 기업은 브로커들의 먹잇감일 뿐이다.

 외교 역시 다르지 않다. 실력 없는 외교관들은 브로커의 유혹을 떨치기 쉽지 않다. 한번 맛들이면 헤어날 수 없다. 내가 어렵게 해야 할 일을 쉽게 해결해 주니 말이다. 자신의 실력을 쌓기보다는 브로커에 의존하려 한다. 의존도가 점점 높아지게 되면 그들에게 흠도 잡히고, 휘둘리게 되어 있다. 이번 ‘상하이 스캔들’이 그렇다. 영사관 직원들은 쉽게 외교를 하려 했다. 중국인과 부딪치며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덩신밍(鄧新明·등신명)이라는 의혹의 여인에게 의뢰했다. 의존도가 높을수록 덩의 요구는 더 높아졌고, 그 요구를 들어줄지 말지를 놓고 서로 싸웠다. 그 사이를 브로커가 파고들어 휘젓고 다녔다. ‘관시 외교’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적나라게 보여준 사례다.

 중국과의 외교 이제 19년이다. 이번 사건은 우리 외교관들이 더욱 중국을 공부하고, 중국인과 직접 부딪치며 경험을 쌓아가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먹잇감을 노리는 브로커는 지금도 실력 없는 외교관을 노리고 있다.

한우덕 중국연구소 부장대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