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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환영의 시시각각

완벽한 정교분리는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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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환영
중앙SUNDAY
사회에디터

정치학 안에는 여러 분과가 있다. 국제정치·비교정치 외에도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종교의 정치학(Political Science of Religion, Religion and Politics)’이라는 분과도 있다. 20세기 말에 생긴 ‘종교의 정치학’을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종교와 정치가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영향을 서로 주고받지만, 정치와 종교는 분리돼야 한다는 게 민주정치의 원칙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존 로크, 마르틴 루터, 토머스 제퍼슨 등 종교인들이나 세속인들이 ‘카이사르의 것’과 ‘신(神)의 것’의 영역을 나누는 정교분리(政敎分離)를 주장했다.

 정교분리가 확고히 자리 잡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유럽 근대화 과정에서 종교와 국가는 끊임없이 충돌했다. 정교분리에 반대하는 의견도 강했다. 그러나 막상 정착시키고 보니 정교분리는 매우 실용적인 원칙이었다. 특히 정교분리가 유럽이나 다른 지역보다 일찍 정착한 미국에서 정교분리는 국가와 종교 모두가 강해지고 ‘윈윈(win-win)’할 수 있는 원칙으로 작용했다.

 국가나 종교나 흥망성쇠가 있다. 종교의 경우, 신자들이 많으면 흥하고 줄어들면 망한다. 어떤 종교에 귀의하거나 믿는 것은 ‘인연 따라 가는 것’이고 ‘신(神)의 섭리’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세속의 관점에서 보면, 종교가 흥하려면 종교와 국가의 사이가 좋아야 한다. 국가의 후원을 받으면 좋고, 최소한 탄압은 받지 않는 게 좋다.

 국가는 예술과 과학의 최대 후원자다. 국가는 종교의 최대 후원자이기도 하다. 물론 종교에는 특정 국제체제·왕정·왕조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건재할 수 있는 자생력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지 못했거나, 냉전에서 소련·동유럽권이 이겼다면 오늘날의 세계 종교 지형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정교분리의 틀 속에서 국가는 종교를 보호하고 종교는 국가가 할 수 없는 일을 한다. 그러나 지금은 소위 포스트모던 시대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이 사라지거나 변하고 있다. 가족, 국가의 위상, 윤리 등 모든 게 흔들리고 바뀌는 가운데 정교분리도 뭔가 다른 것으로 진화 중이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정교분리 원칙이 자리 잡은 미국만 해도 정교분리가 흔들리고 있다. ‘기독교 우파(Christian Right)’로 불리는 보수 기독교가 정교분리를 흔들고 있다. 1970년대부터 형성된 기독교 우파는 정교분리 상태로는 사회의 세속화를 막고 가족의 가치를 지킬 수 없다고 본다. 기독교 우파는 미국 헌법에 정교분리가 명시돼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기독교 우파는 미국 유권자의 15%를 차지하는 투표 블록(voting block)이다. 현재까지는 공화당이 독점하다시피 하는 표밭이다. 그래서 미국 민주당은 기독교 표심을 얻기 위해 힘써왔다. 유럽에서도 국가가 종교 영역에 간섭하는 일이 잦아지는 등 정교분리가 흔들리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정교분리에 미묘한 변화가 있다. 과거에는 주로 민주화 운동에 기여한 ‘운동권’ 기독교와 불교의 정치 참여가 정교분리를 깬다는 비난을 받았다. 사학법 개정, 수쿠크 도입을 둘러싼 논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최근에는 과거 정교분리 원칙에 충실했던 종교·교단들이 정치화되고 있다. ‘대통령을 위한 기도 시민연대(PUP)’나 ‘교구장의 교도권을 지키려는 천주교 신자들’과 같은 단체의 결성도 이러한 흐름과 무관치 않다.

 정교분리가 당연한 것은 아니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정교분리는 민주주의가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다. 조선왕조나 일제 강점시대에도 정교분리는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앞으로도 정교분리는 정치와 종교 모두를 위해 필요하다. 정교분리의 큰 틀은 유지될 가능성도 크다. 그러나 종교가 이미 정치 세력화된 이익집단의 성격도 띠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다. 필요하다면 종교청이라도 설립해 정치와 종교의 갈등을 ‘포스트 정교분리 시대’에 맞게 조정해야 한다.

김환영 중앙SUNDAY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