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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고 지도자 해부] 시진핑의 경쟁마 ‘리틀 후진타오’ 리위안차오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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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쑤성 롄수이현에서 태어나 상하이 사범대학에서 수학
리위안차오(李源潮·이원조)은 장쑤(江蘇)성 롄수이(漣水)현에서 1950년 11월 태어났다. 아버지 리간청(李幹城·이간성)은 신사군(新四軍) 출신 노간부로 천이(陳毅·진의) 장군이 이끈 제3야전군을 따라 상하이에 주둔했다. 이 인연으로 훗날 상하이시 부시장을 역임했다.

장쑤성 북부에 위치한 롄수이현은 후진타오(胡錦濤·호금도)의 고향인 장쑤성 타이저우(泰州)시와 맞붙은 곳이다. 리위안차오는 후진타오와 쑤베이(蘇北) 동향인인 셈이다.

리위안차오는 유년 시절을 상하이에서 보냈다. 1966년에 문화대혁명이 일어났을 때, 리위안차오는 초급중학을 막 졸업했다. ‘수업을 멈추고 혁명을 하던’ 시대였다. 고등중학에 입학할 여건이 안됐다. 게다가 부친이 ‘문혁’의 비판 대상이 됐다. 부친이 군을 떠나 장기간 행정 일을 했기 때문에 군대의 끈이 끊겼다. 다른 많은 간부자제와 같이 리위안차오가 군대에 들어갈 수 없던 이유다. 1968년 장쑤성 다풍(大豊)현에 있는 상하이 농장에 배치 받아 농업노동자가 됐다. 그 자리는 당시로서는 입대한 병사 다음으로 괜찮은 자리였다. 한 달에 20여 위안의 임금을 받았다.

리위안차오는 부친의 배경과 자신의 성실함, 주어진 임무를 끝까지 완수하는 근무 태도 때문에 농장의 직원·노동자·간부들과 관계가 좋았다. 1970년 농장 청년활동을 지도하는 간부로 발탁됐다.

리위안차오는 일하는 틈틈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1972년 노농병(노동자·농민·병사)의 대학입학추천제도가 시행됐다. 이 조치에 의해 한 농장에서 2명 정도를 추천할 수 있었다. 리위안차오가 선발됐다. 그는 상하이 화동사범대학 수학부에 입학했다. 2년 과정의 속성 클래스였기 때문에 1974년 졸업할 수 있었다.

리위안차오는 1974년 졸업한 후 상하이시 난창(南昌)중학에서 2년, 상하이시 루완(盧灣)구 야간 공업전문대에서 4년간 수학을 가르쳤다. 1978년 여름 공산당에 입당했다. 1978년 여름 리위안차오는 푸단(復旦)대학 수학부 수학전공으로 다시 입학해 1982년 졸업했다.

푸단대학 공청단위원회는 리위안차오를 수학부 공청단 총지부 부서기로 다시 서기로 발탁했다. 리위안차오는 푸단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학교에 머무르며 대학 수학부 교직을 맡았다. 후에 대학공청단위원회 부서기, 공청단 상하이시위원회 부서기를 거쳐 서기로 발탁됐다.

◇후진타오와 함께 공청단 중앙에서 근무하다
1983년 10월 공청단 중앙조직에 대한 인사가 단행됐다. 이전까지 학교부를 주관해왔던 천하오쑤(陳昊蘇·진호소, 천이의 장남)와 단중앙판공청·기밀·재정을 주관하던 허광웨이(何光煒·허광위, 허창꿍(何長工·하장공) 전지질부장관의 아들)가, 왕자오궈(王兆國·왕조국) 공청단 중앙제1서기와 후진타오 제2서기와의 불화를 이유로 해임돼 공청단 중앙에서 물러났다. 그 때문에 리커창(李克强·이극강) 학교부 부장이 천하오쑤의 뒤를 이어 공청단 중앙서기처 후보서기에 임명됐다. 상하이시 공청단위원회 서기를 담당하던 리위안차오 역시 중앙으로 발탁돼 서기처서기에 임명됐다. 후진타오가 그때까지 담당하던 공청단 선전활동을 맡게된다.

당시 후야오방(胡耀邦·호요방) 중국공산당 중앙총서기는 왕자오궈를 중공중앙판공청주임으로 후진타오를 공청단 중앙제1서기에 임명하기 위한 사전 작업을 진행했다. 그보다 앞서 ‘태자당’과 일반대중출신인 공청단 지도자와의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일련의 인사를 단행했다. 1984년 초 쑹더푸(宋德福·송덕복) 해방군 총정치부 청년처 처장을 공청단 중앙으로 인사 이동시키고 조직문제를 담당하는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를 맡겼다.

1984년 11월 공청단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에서 후진타오는 정식으로 공청단 중앙제1서기로 선출됐다. 그 밑에 쑹더푸, 리위안차오, 리커창이 각각 조직, 선전, 학교를 주관하는 서기처 서기에 선출됐다. ‘1쑹, 2리’라는 후진타오의 강력한 부하 조직이 갖춰진 것이다.

리위안차오는 이보다 앞선 1983년10월 공청단 중앙에서 선전을 담당했다. 당시는 덩샤오핑이 제기한 ‘정신오염반대’ 정치운동이 진행되던 중이었다. 즉 83년10월24일 중공중앙이 전국의 현(縣)과 인민해방군의 연대급 당조직에 정신오염방지에 관한 제36호 통지를 내렸다. 각급 당조직은 색정적이고 엽기적인 비디오와 이와 유사한 각종 간행물을 철저히 색출하고 또 주요 범죄자는 형법에 따라 처리할 것을 지시했다.

이로 인해 한동안 전국 각지에서는 ‘문혁’초기에 보이던 부르주아 계급의 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습관을 타파하는 운동인 사구(四舊) 타파 운동과 유사한 정치 테러가 출현했다. 막 시작되던 개혁개방 경제 드라이브 정책에 충격이 가해졌다.

후야오방이 주관하던 중공중앙 서기처는 자오쯔양(趙紫陽·조자양), 완리(萬里·만리) 등과 함께 덩샤오핑에게 이 상황을 보고했다. 정신오염반대운동을 정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와 동시에 왕자오궈와 후진타오 등에게는 정신오염반대 운동이 확대되는 것에 반격하는 조치를 취하도록 지시했다.

후야오방의 지시를 받은 후진타오는 리위안차오를 불렀다. ‘중국청년보’에 ‘오염은 배제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생활도 아름답게 가꾸지 않으면 안된다’는 제목으로 미화와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것(머리 퍼머, 꽃무늬 패션, 화장, 포크댄스 등)을 정신오염으로 여기는 오류를 비난하는 기명 논설위원의 논문을 게재했다. 이 논문은 ‘공인일보’ 등에도 전재됐다. 정신오염배제 운동에 대한 반대의 신호탄이었다. 덩샤오핑은 급변하는 정세를 보고 정신오염배제운동의 종료를 명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보수파 이론가로 정신오염론을 전개했던 덩리쥔(鄧力群·등력군, 전 중공중앙선전부장) 등이 “잘못된 정세보고를 했다”고 비난했다.

정신오염 배제운동이 끝난 뒤 후진타오는 ‘1쑹, 2리’의 협력을 기반으로 당시 중국을 방문한 일본청년 3000명을 접대했다.

리위안차오는 중국공산당이 채택한 ‘경제체제개혁에 관한 결정’ 기조에 기반해 후진타오와 협력해 나갔다. 공청단 주최 ‘도시청년 개혁 적극분자·베이징 개인경영자 교류회’를 개최했다. 상공업 개혁에 대한 청년층의 지지를 표명한 것이다.

그 밖에도 리위안차오는 공청단 중앙이 주최한 청년공장장(사장) 기업관리연구반 등 각종 학습활동을 조직하고 더 나아가 성·시 공청단 조직이 기업을 개설하는 시도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또 리위안차오는 공청단 중앙에서 각종 활동을 지휘 조직하면서도 자주 지방을 순시하면서 조사연구를 수행했다. 당시 리위안차오는 자신의 신조를 중시했다. 지방 성·시 공청단위원회는 순찰 나온 리위안차오를 성대하게 접대하고자 했다. 하지만 리위안차오는 중앙의 ‘요리 4개 탕 1개(四菜一湯)’라는 규정을 철저히 준수했다. 이를 위반하는 경우에 처하면 그는 자리에 앉는 것을 거부하거나 철저히 초과 비용을 지불했다. 접대 측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리위안차오 측과 충돌하거나 대립하기도 했다. 일부 성·시 공청단 위원회 간부들이 그에게 불만을 갖게 된 것이다.

1983년10월부터 1985년7월까지 후진타오와 리위안차오는 1년8개월 동안 일을 함께 했다. 당시는이런저런 일들이 많던 시기였다. 개혁개방의 신봉자였던 후와 리는 그 동안 상호 친밀감을 높였다. 고급간부자제와 평민간부 사이의 갈등도 없었다. 후진타오 그룹의 듬직한 지주가 된 것이다.

◇‘두 이씨의 출세운’에 미묘한 변화
1985년7월 후진타오가 구이저우(貴州)성 제1서기로 자리를 옮겼다. 후진타오 후임으로 쑹더푸가 공청단중앙제1서기에 취임했다.

1993년5월 공청단 제13차 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됐다. 그 전에 쑹더푸가 국무원인사부장으로 전임(1993년3월)됐기 때문에 리커창을 중앙제1서기로 선출했다.

공청단 중앙제1서기는 성장·장관급의 포스트다. 리위안차오는 연령적으로 여유가 있었지만 공청단 중앙활동은 청년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중공 중앙은 공청단 중앙 제1서기로 젊은피를 선호했다. 공청단에서의 경력만을 살펴보면 리위안차오가 공청단서기처서기를 담당했을 당시 리커창은 후보서기에 불과했다. 후보서기는 국장급 간부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1984년11월 후진타오가 공청단 중앙 제1서기에 선출됐을 당시 리위안차오와 리커창은 함께 동일한 서기직에 있었다.

1993년5월 공청단 제13회 전국대표대회 개최 당시 리위안차오는 43세, 리커창은 다섯 살 어린 38살이었다. 젊은피를 찾는 관례 때문에 리커창이 리위안차오 보다 공청단 중앙지도자 자리에 어울렸다. 공청단 제1서기 자리를 놓친 리위안차오는 대신 국무원보도판공실 부주임, 중앙대외판공실부주임, 중앙대외선전소조부조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리커창에게 승진에서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리커창의 출세운은 리위안차오보다 좋았다. 1996년 리위안차오는 국무원문화부부부장겸 당조부서기에 임명된다. 반면에 1997년9월 중공 제15차전국대표대회에서 공청단 제1서기였던 리커창은 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됐다. 리위안차오는 2002년 중공 제16차전국대표대회에서야 비로소 중앙후보위원에 선출되는데 그쳤다. 리커창에 비해 차이가 벌어진 것이다. 리위안차오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문화부부부장에 재직하던 1998년 중앙당교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 도광양회(韜光養晦), 훗날을 위해 칼을 갈기 시작한 것이다.(계속)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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