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세 傳貰씨 `화려한 날`은 지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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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장원기자] 한 세기를 훨씬 넘게 살아오신 전세(傳貰)씨. 요즘 건강이 예전만 못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최근 들어 부쩍 사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청와대 국제경제보좌관을 지낸 프린스턴대 신현송 교수는 최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전세씨 역할은 끝났다(전세의 순기능이 사라진 것이다)”는 말까지 뱉었습니다.

여기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환절기를 맞아 운명을 달리하는 친구들이 잇따르는 것을 보면 마음이 착잡합니다. ‘그래도 아직 기력이 펄펄한데 임종을 준비해야 하나…’.

어떤 땐 울화통이 터지기도 합니다. ‘내가 얼마나 많이 베풀고 살았는데. 너네들이 뭘 알아.’

전세씨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국내에만 있는 이름이지만 국내에서는 너무도 흔합니다. 서울시만 보더라도 10가구 중 3가구 꼴입니다. 현재 서울시내 가구는 370여만 가구로 추정되니까 100여만 가구가 전세입니다.

전세씨가 태어난 해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지금으로부터 한세기가 넘는 조선말기 태어났다는 말이 유력합니다. 1876년 방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 뒤 서울 인구가 크게 늘 무렵 세상에 나왔다는 겁니다.

1900년 무렵 조선을 방문한 한 일본학자는 “전세씨는 조선에 있는 이름으로 주로 경성 내에서 볼 수 있다(전세는 조선에서 행해지는 가옥임대차의 방법으로, 주로 경성 내에서 행해지는 관습이다)”고 했답니다.

전세씨는 무주택씨가 집을 마련하고 유주택씨가 집 장사로 돈을 버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무주택씨에게는 내집 마련 종자돈을 보태줬고 유주택씨에게는 적은 돈으로 집을 사서 튀길 수 있는 지렛대를 줬으니까요.

전세씨에게 위기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2000년대 들어 전세씨의 몸값이 크게 뛰자 전세씨 대신 월세씨를 찾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습니다. 당시 저금리로 돈 굴릴 데가 없던 사람들이 월세씨를 선호했던 거죠.

하지만 전세씨는 어려움을 꿋꿋하게 이겨내고 2000년대 초중반 집값이 급등할 때 유주택씨와 무주택씨의 폭 넓은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전세씨가 예전만 못한 모습을 보이자 여기저기서 딴 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사실 그동안도 전세씨 위세는 야금야금 꺾였습니다. 1990년만 해도 10가구 중 4가구 꼴이었으니 말입니다.

전세 선호도 여전히 높아 쉽게 바뀌지 않을 듯

여기다 전에는 어린애 취급했던 월세씨가 부쩍 늘었습니다. 1990년 10가구 중 2가구였는데 지금은 4가구 중 한가구입니다. 전세씨만은 못해도 그새 많이 큰 거죠.

월세란 놈이 치고 올라오고 힘은 떨어지고 전세씨가 요즘 잠을 못 잔답니다.

이렇게 되자 월세씨가 전세씨의 후계자가 될 것이란 전망이 많습니다. 프린스턴대 신 교수는 “앞으로 월세씨가 일반화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최근 한나라당 주최로 열린 간담회에서 건국대 심교언 교수(부동산학과)도 “월세씨가 많아질 것에 대비한 대책 수립도 지금부터 진행돼야 한다”고 했죠.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은 2020년 월세씨 비율이 30~31%로 전세씨(17~18%)를 능가할 것으로 보고 있습죠.

이런 주장들의 근거엔 달라진 세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이 바뀌면서 깡패 세계에서 주먹보다 연장으로 승부를 가르듯 말이죠.

전세씨가 맹활약하던 시절은 절대적 공급 부족 속에 집값이 크게 오르던 때였습니다. 경제 성장이 빠르고 소득이 많이 느는 데다 저축률도 높았을 때였죠.

사람들은 열심히 돈을 모아서 전세씨를 사귄 뒤 전세씨 덕에 집을 마련했습니다. 월급을 받으면 일단 저축부터 하고 나머지로 다른 소비를 했던 거죠.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저축해서 전세씨 사귀기도 어렵습니다. 젊은층은 더욱 그렇습니다. 조금 모았다 하더라도 소득 대비 집값이 워낙 비싸 전세씨 도움으로 내집 마련이 이전보다 훨씬 어려워졌습니다.

시대가 달라졌으니 이제 전세씨도 서서히 은퇴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전세씨에서 월세씨로 평화적으로 권력 승계가 이뤄지려면 금융•세제 등 제도적 뒷받침이 따라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세씨 슬퍼 마세요. 새로운 녀석들이야 월세를 사귀더라도 오랜 친구들은 당신을 쉽게 버리지 않을 것이니 말입니다.

국민은행이 2009년 전세씨 친구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10명 중 8~9명은 월세씨로 친구를 바꾸지 않고 계속 전세씨 옆에 남아있겠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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