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일각에서 개헌 논의가 진행되면서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사이엔 미묘한 갈등 기류가 흐르고 있다. 그간 ‘최고 재판기관이 어디냐’를 놓고 대립해 온 두 기관의 통합론이 여권에서 제기된 것이다.
특히 이들 기관의 수장인 이용훈(69) 대법원장과 이강국(65) 헌법재판소장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사안”이라며 대응논리 개발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단초를 제공한 것은 김황식 국무총리였다. 대법관 출신인 김 총리는 지난달 25일 청와대 주례회동에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대법원과 헌재의 역할 조정도 헌법상 문제”라며 두 기관의 통합 문제도 논의해야 한다고 건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가운데 이 대법원장은 최근 대법관들과 환담하는 자리나 대법원 간부회의 등에서 개헌 시 양 기관의 통합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재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체적인 방식은 헌재의 기능을 대법원으로 흡수하자는 것이다. 즉 미국 연방대법원처럼 위헌심사권을 대법원에서 행사해야 한다는 게 통합론의 핵심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13일 “‘정치적 사법기관’인 헌재는 삼권분립 측면에서 그 역할과 위상이 모호할 뿐만 아니라 출범 후 20여 년간 사회적 민주화가 이뤄져 그 소임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며 “이 대법원장도 같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헌재가 한정위헌 결정 등을 통해 국회에서 통과된 법률의 내용을 사실상 변경하는 것은 삼권분립과 민주주의 원칙에 맞지 않다”고 했다.
반면 헌재 측은 김 총리의 ‘통합’ 발언에 강한 불쾌감을 나타냈다. 지난 8일 예정됐던 김 총리와 헌법재판관 9명의 만찬이 이 소장의 지시로 취소됐다. 이 소장은 오히려 헌재의 독립성과 권한을 강화해야 할 시점이란 점을 강조하고 있다. 헌재 관계자는 “양 기관의 통합은 과거의 권위주의 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이라며 “헌법재판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현실에서 오히려 헌재의 존립기반을 공고히 하고 권한을 확대할 필요성이 있다는 게 이 소장의 뜻”이라고 전했다. 그는 또 "세계적으로도 헌재를 설치하는 국가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당 전현희 의원 등이 한정위헌 등 ‘변형 결정’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2009년 발의한 헌법재판소법 개정안을 헌재가 적극 지지하는 이유다.
최근 이 대법원장은 이 소장을 만난 자리에서 대법원과 헌재의 통합 문제를 화제에 올린 적이 있다고 한다. 이 소장은 “큰 집(대법원)이 작은 집(헌재)을 먹으려고 한다”고 농반, 진반으로 받아친 것으로 전해졌다.
두 기관은 헌법재판관 임명 방식을 놓고도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다. 대법원은 대통령·국회·대법원장이 재판관을 3명씩 지명하는 현행 방식은 입법-사법-행정부 간 상호 견제를 위해 합리적이라고 본다.
헌재는 선출된 권력인 대통령과 국회의 지명에 대해선 이견이 없지만 대법원장이 3명을 지명하는 것은 민주적 정당성을 해칠 우려가 있다고 반박한다.
대법원과 헌재의 갈등은 헌재가 1988년 출범한 뒤 계속 이어졌다. 96년 양도소득세 산정 기준 사건, 2001년 국가배상법 사건, 2009년 상속세법 사건 등 헌재가 한정위헌 결정을 내린 법률 조항에 대해 대법원은 합헌으로 해석했다.
조강수 기자
◆변형결정=헌재가 특정 법률에 대해 단순 위헌 여부를 판단하는 게 아니라 "…로 해석하는 한 위헌”(한정위헌) “…로 해석하는 한 합헌”(한정합헌)이라고 결정하는 것. 대법원은 변형결정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