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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수·김구라 호통 개그, 원시시대부터 내려온 싸움놀이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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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잘 웃기지 못하니 웃음에 관한 책이라도 쓰자고 시작했다”는 이윤석. 한 TV토크쇼에서 밝힌 ‘이경규 어록’은 절반 정도 완성됐다고 한다. “경규 형님이 취중에 철학을 읊으면 (윤)형빈이가 메모하고 제가 주석을 다는 거죠. 셋의 공저로 언젠가 낼 겁니다.” [변선구 기자]


이 책을 받아 든 이경규의 일성. “야, 넌 왜 웃음을 분석하고 그러냐. 그냥 웃기기나 해라.” 읽고 나선 한마디 더. “어떻게 심지어 책도 안 웃기냐!”

 그렇다. 박사 개그맨 이윤석(39)이 쓴 『웃음의 과학』(사이언스북스)은 부제 그대로 ‘웃기지 않는 과학책’이다. “너무 학술적으로 간 것 아니냐”는 이경규의 촌평처럼, 여느 코미디언들이 쓴 무대 뒷얘기, 혹은 성공학과 다르다. 역사·심리·생물·철학, 뇌 과학까지 넘나들며 종횡무진 웃음을 파헤친다.

 10일 오후 서울 정동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과학책을 즐겨 읽는데 웃음에 대한 연구는 부족하더라고요. 방송에서도 코미디 프로그램이 서자 같은 느낌인데, 학계에서도 그러니 책임감을 느꼈죠. 개그맨 17년차로서 직업적 정체성도 확인하고 지식 독자들에게 웃음의 맛을 느끼게 하려고 3년 걸려 썼어요.”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중앙대 석·박사(신문방송학)를 마친 학구파이자 독서광으로서 이 책은 단연코 예능이 아니라 다큐다. 그러나 여느 과학책보다 술술 읽히는 것은 한국 코미디계의 실례가 풍부하게 담겼기 때문이다. 그러니 묻는다. 우리 시대 대표 코미디언들이 뜬 이유가 과학적으로 뭘까.

#박명수·김구라 - 시대가 도와준 공격 개그

박명수(左) 김구라(右)

 이들의 막말·호통 개그는 실은 수백 만년 전 원시 시절부터 내려온 ‘싸움놀이’에 바탕한다. 침팬지를 비롯한 영장류가 간질임 태우기 등 ‘서로 해치지 않음’을 전제로 놀이하듯, 방송에서도 서로가 약속한 채 ‘공격 개그’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윤석은 이것이 통하게 된 문화가 한국 사회의 민주화·경제발전과 관계 있다고 말한다. “독재 정권 시절에는 바보 코미디가 아니면 시청자를 웃기기 어려웠죠. 모두가 사회적 약자 신세였으니까요. 지금은 TV가 나를 우롱하고 저들끼리 치고 받아도 여유가 있으니까 즐길 수 있어요. ” 

#유재석·강호동 - 인성 자체가 웃음 코드

 이윤석은 2007년 유재석·정은아를 모델로 분석한 박사 논문을 썼다. 당시 그의 궁금증은 ‘왜 사람들은 진행자 가운데 유독 이 두 사람을 좋아하나’였다. 첫 손에 꼽힌 이유가 이들의 인간미였다. 유머나 화술이 아니었던 셈이다. “웃음의 우월론적 관점에서 보면, 코미디언은 사람들의 우월감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만들어진 전문가들입니다. 코미디 방식이란 게 결국 그 코미디언의 본성을 못 벗어나는데요, 유재석은 주위를 추켜세우는 인성이 상품화 된 쪽이고, 이경규·강호동은 성질을 못 참고 발산하는 모습이 시청자의 우월감을 만족시켜주는 거라 볼 수 있죠.”

 오락프로에서 리얼 버라이어티가 대세인 데 대한 통찰도 보인다. ‘무한도전’ ‘남자의 자격’ 등은 모두 ‘찌질한’ 이들이 노력하고 성장하는 내러티브를 가진다. 그 이유가 “이제는 코미디가 시청자의 우월감뿐 아니라 공감·동일시 감정까지 충족시켜줘야 하기 때문”이란다.  

#이경실·정선희 - 고군분투하는 여성 코미디언

 웃음의 성 역할에 대한 접근도 돋보인다. 지금까지 연구 결과는 ‘웃음은 여성의 것이고 유머는 남성의 것’이란 걸 보여준다. 일상에서나 무대에서나 웃기는 주체는 주로 남자이고 까르르 웃어주는 건 여성의 몫이다. 웃음의 권력론이라 할 수도 있는데, 유머란 게 대체로 강자가 주도하게 마련이다. 이 지점에서 그는 개그우먼들을 ‘웃음의 레지스탕스’라고 추켜세운다.

“여자라면 누구나 예쁘고 사랑스러워 보이고 싶은데, 여자 코미디언은 못 생기고 뚱뚱한 걸 자처해야 하죠. 소위 뜨고 나서도 여자 코미디언의 버럭 개그는 남성처럼 수용이 안 돼요. 그런 면에서 모든 여자 후배들에게 파이팅 해주고 싶고, 어려운 길을 가는 이경실·정선희를 응원합니다.” 

#박사 이윤석은 “왜 사냐건 웃지요”

 그가 생각하는 포스트 유재석·강호동·이경규는 “없다.”

 “이미 그들은 시청자의 가족이나 마찬가지죠. 그들이 은퇴하기 전까진 대체할 수 없다고 봐요. 경규 형님이 ‘앞으로 30년 더하겠다’고 했는데, 그럼 저도 더 오래 버텨야 기회가 오겠죠.”

그는 데뷔 이래 지적인 개그를 기대하는 시선에 부응 못해 고민이 많았다. 그런 점에서 ‘남자의 자격’은 전환점이 된 프로그램이다.

 “한방에 빵빵 웃기진 못해도 꾸준히 성실히 하는 모습이 인정받게 돼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저더러 이경규의 노예라고 놀리는데요, 사실 경규 형이 완전히 ‘애기’예요. 마음대로 안 되면 막 성질 부리는데, 그걸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관계죠. 웃음은 시그널을 이해하는 거예요. 한 수 높은 경지로 하하하 웃는 것, 그 이상 건강하고 행복한 게 어디 있겠어요. 이건희 회장보다 더 많이 웃는 삶이 성공하는 삶이랍니다.”

글=강혜란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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