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가장 근접한 한국인 “난 신경 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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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여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미국의 다국적 제약사 머크. 세계 2위의 제약사에서 연구개발(R&D)을 총괄하는 이가 한국계 미국인 피터 김(53·사진) 박사다. 한국이름은 ‘김성배’. 포스텍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최근 한국을 찾았다. 그는 노벨과학상에 가장 근접한 한국인 과학자로 꼽힌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생물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1990년대 중반 에이즈 바이러스가 인간의 세포에 침투하는 과정을 처음으로 밝혀내면서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학술지 ‘네이처’와 ‘사이언스’ 등에 30여 편의 논문을 게재했다.

 김 박사는 8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국내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솔직히 노벨상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다. 열렬히 갈구한다고 주는 상이 아닌 만큼 신경을 끄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인의 노벨상 조급증을 꼬집었다. “한국인들이 노벨과학상 수상자의 탄생을 고대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다. 요즘 톱클래스 저널을 보면 한국인이 쓴 논문을 많이 본다. 여기서 만족하지 말고 보다 장기적인 투자와 인재 양성이 필요하다. 단기간 내 홈런을 치겠다는 생각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인재 양성과 관련해 자신의 옛날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중학생 시절부터 여동생과 함께 홀어머니 밑에서 컸다. 고교에서 과학교사를 하던 어머니였지만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다. 김 박사는 “코넬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스탠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두 학교 모두 장학금과 학자금 융자제도가 훌륭했다”며 “공부를 계속 하고 싶지만 경제적으로 여의치 않은 학생들이 돈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함께 단순 암기를 지겨워하는 학생들이 창의적인 사고로 새로운 것을 발견해 나가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지 깨닫게 하는 환경 조성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국내에서 이공계생들이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하려는 추세에 대해 그는 느긋했다. 김 박사는 “어느 직업을 택하더라도 자신이 정말 재미를 갖고 즐길 수 있는 분야를 택할 용기가 있으면 된다”며 “의대를 졸업하고도 R&D에 흥미를 느낀다면 기초의학을 선택해 훨씬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김 박사는 미국에서 태어나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 아내와 사이에서 나은 3형제의 이름을 모두 한국식(범신·범석·범수)으로 지어 조국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한국에서는 이공계 박사나 전문가들이 자식들의 이공계 선택을 꺼린다는 얘기에 대해 그는 “첫째 아이는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있고, 아이들 모두 과학에 흥미를 느끼는 편”이라며 “과학자의 길을 따라온다면 막을 생각이 없다”고 웃으며 말했다.

 험난한 신약개발 과정에 대해 그는 “그래도 신약개발에 투자해야 성장을 담보할 수 있다. 대신 R&D 생산성을 높이는 데 주력한다”고 강조했다. 일례로 머크의 자궁경부암 백신인 가다실을 들었다. 전세계에서 연간 50만명이 자궁경부암 진단을 받고 이중 절반이 한창 활동할 나이에 사망하는 상황에서 2006년 출시된 가다실이 70%의 예방률을 보이고 있다는 것. 그는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노인성 질병 치료제와 백신 개발은 여러 사람의 건강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신약개발에도 스마트 바람이 불고 있다고 덧붙였다. 최근 머크가 인수한 ‘스마트셀’이라는 회사가 생산하는 ‘스마트 인슐린’을 예로 들었다. 기존의 인슐린을 체내에 주사할 경우 기준치 이하로 혈당을 떨어뜨려 쇼크를 일으키는 수가 간혹 있는데, 스마트셀의 인슐린은 기준치 이상의 혈당에서만 작용하는 방식이어서 쇼크를 일으킬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다.

심재우 기자

◆피터김=1998년 호암상 과학상을 수상했다. 당시 상금으로 받은 1억원을 어머니의 모교인 서울대에 장학금으로 쾌척했다. 2001년 머크에 합류해 2003년부터 머크의 신약과 백신의 R&D를 총괄하고 있다. 현재 직함은 머크 수석부사장 겸 연구소 사장으로, 머크 내에서 ‘넘버 3’의 핵심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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