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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목을 친 혁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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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인류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부분은 왕에 대한 국민의 혁명이다. 그 혁명이 봉건(封建)을 죽이고 근대를 탄생시켰다. 그런 혁명의 시초가 1649년 영국 청교도 혁명이다. 절대왕권을 신봉한 찰스 1세는 의회를 해산하고 독재를 시작했다.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은 의회파 반군(叛軍)을 이끌었다. 반군은 승리했고 왕정은 폐지됐다. 왕은 도끼로 처형됐다. 크롬웰의 9년 집권 후 잠시 왕정이 복구되기도 했지만 영국은 1688년 명예혁명을 거치면서 입헌군주국가가 된다.

 크롬웰은 기나긴 혁명의 시대를 알리는 나팔수였다. 영국의 청교도 혁명은 127년 후 신대륙에서 자유롭고 민주적인 나라를 탄생시켰다. 1776년 미국이 영국을 상대로 독립혁명을 완수한 것이다. 영국 혁명은 프랑스에도 계몽사상의 씨앗을 뿌렸다. 씨앗은 나무로 자라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5년 후 프랑스 국민은 단두대로 루이 16세 부부의 목을 잘랐다.

 영국과 프랑스만이 아니었다. 세계의 중심국가들은 한결같이 피의 혁명으로 봉건 왕정이나 독재 제정(帝政)을 무너뜨렸다. 1917년 혁명에서 러시아 국민은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를 총살해 버렸다. 그 혁명에 자극 받아 독일에서는 1918년 군인과 노동자가 반란을 일으켰다. 영국·프랑스보다 많이 늦었지만 결국 독일 국민도 일어난 것이다. 마지막 황제 빌헬름 2세는 외국으로 쫓겨났고 독일은 공화국이 됐다. 혁명의 바람은 아시아도 강타했다. 1912년 신해혁명으로 중국 국민은 2000년의 전제(專制)정치와 이별했다.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는 죽지는 않았지만 쓸쓸히 사라져갔다.

 물론 혁명이 위대한 나라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러시아는 공산주의라는 잘못된 선택으로 독재와 혼란을 겪었다. 중국은 자본주의 혁명을 선택했지만 혁명의 정착에 실패했다. 혁명은 소용돌이에 휩쓸렸고 오랜 내전과 혼돈 끝에 중국은 사회주의 체제로 귀착했다.

 혁명의 결과는 이처럼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결과가 어떻든 국민이 절대권력자에 대해 혁명을 해냈다는 사실은 국가의 정신사(精神史)에 중요한 분수령이 된다. 옳지 못한 왕을 국민이 죽이거나 쫓아낸다는 것…그것은 국민 스스로 정의를 실현하는 의식혁명인 것이다. 이 혁명을 요란하게 겪은 나라는 모두 세계의 중심국가가 돼 있다. 그래서 혁명은 필요한 것이다.

 불행히도 한국은 일제 식민지배로 혁명의 기회를 놓쳤다. 봉건적인 대한제국이 국민의 손이 아니라 외국의 총칼로 무너진 것이다. 한국인이 자력(自力)으로 봉건 통치를 엎었다면 한국인의 위상과 정신세계는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은 영원히 불행하지는 않았다. 비록 왕조에 대한 혁명은 아니지만 그래도 준(準)혁명을 여러 번 이뤄낸 것이다. 1960년 4·19와 1987년 6월 봉기는 독재를 무너뜨렸다.

 혁명의 역사에서 가장 불행한 국민은 북한 사람들이다. 1945년 해방 이후 그들은 한번도 혁명을 경험하지 못했다. 1989년부터 동구 공산권이 무너져 내렸지만 그 바람은 북한 국경을 넘지 못했다. 북한 내 혁명의 기운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세습에 대해 주민의 반감은 별로 없었다. 경제상황도 비극적이지 않았다. 주민들은 오히려 북한식 사회주의를 사수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튀니지·이집트가 변했듯이 북한도 예전과는 다르다. 정권과 주민이 모두 벼랑 끝으로 가고 있다. 혁명의 바람을 막을 문풍지는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다. “북한만은 다르다”는 주장도 많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장기독재는 예외 없이 몰락했다. 한국의 10·26처럼 총알 몇 방이든, 루마니아 차우셰스쿠를 무너뜨린 민중의 함성이든, 변화는 반드시 온다. 그것이 인류사 불멸의 교훈이다. 1649년 영국에서 왕의 목을 쳤던 크롬웰의 장풍(掌風)… 그 혁명의 바람이 지금도 불고 있다.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