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레터〈Love Letter〉

중앙일보

입력

〈러브 레터〉

당신은 잘 지내나요? 난 잘 지내요!

사고로 연인을 잃은 여인. 그는 우연히 애인의 중학교 졸업 앨범에서 연인의 과거 주소를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편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예기치 못했던 답장이 옵니다. 죽은 애인의 이름으로 말이지요. 과연 이 편지는 애인이 진짜 천국(주인공의 말대로)에서 보낸 것일까요?

이와이 슈운지의 95년작 〈러브 레터〉는 이미 한국에서 유명한 작품입니다. 불법으로 유통되는 비디오로 이 영화를 본 관객은 수만 단위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한때 〈스크림〉과 함께 이런 유통 경로를 거친 영화 중에 "최고의 흥행작"이었습니다. 덕분에 이와이 슈운지도 한국에서 인기있는 감독 대열에 올랐습니다.

어쨌든 이 〈러브 레터〉가 11월 20일 국내에서 개봉합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영화는 후지이 이츠키라는 연인을 등반사고로 잃은 와타나베 히로꼬(나카야마 미호)가 과거 그가 살던 주소로 편지를 보내는 것이 시작입니다. 그런데 후지이 이츠키라는 이름으로 답장이 도착하지요.

계속 이 정체불명의 후지이 이츠키와 편지를 주고 받던 히로꼬는 자신을 사랑하는 아키바(토요카와 에츠시)와 함께 그 주소를 찾아 갑니다. 실제 그곳에는 후지이 이츠키(나카야마 미호)라는 여자가 살고 있었고, 그가 자신의 연인 후지이 이츠키와는 동명이인이자 중학교 동창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뒤로 둘이 주고 받는 편지의 내용은 후지이 이츠키라는 인물의 과거 모습이 주를 이루게 되지요. 그러면서 히로꼬는 죽은 연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게 되고, 또 다른 후지이 이츠키는 자신의 추억을 더듬다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실과 감정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존 관습적인 멜로물의 구도에서 사랑하는 두 남녀 주인공의 모습 중 하나를 완전히 제외하고 영화를 이끌어 나가기란 무척 힘듭니다. 남자의 모습을 배제하고(물론 중학교 때의 모습이 보이지만, 이 부분이 하나의 독자적인 멜로물로서 완제품 역할을 할 수 없지요), 여자의 심리만으로 멜로물의 분위기를 묘사하는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러브 레터〉는 신선합니다.

특히 히로꼬가 산에서 울음 섞인 목소리로 "당신은 잘 지내나요, 난 잘 지내요."를 외치는 장면, 이츠키가 과거 남자 이츠키가 대출해 간 책(제목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지요)의 대출카드에서 자신을 그린 그림을 발견하는 장면은 주목할 만합니다. 즉 이 대목은 영화 〈러브 레터〉가 가진 독특한 형식의 멜로 구조를 마무리하는, 형식과 내러티브 상에서 최절정이라 할 수 있지요.

그래서 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 속에 있던 사랑을 정리하고, 또 한 사람은 과거 자신의 기억 속에 서 스치고 지나간 사랑의 존재를 새삼스럽게 깨닫습니다. 아울러 여기서 우리는 이 두 개의 장면에서 공히 아련함, 혹은 애잔함이라는 감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와이 슈운지는 이 정서를 영화 내내 은근히 바탕으로 깔고 있습니다. 영화 내내 그것은 안개와도 같이 모호하게 감추어져 있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스스로 정리를 하기가 어렵지만, 감독은 마지막의 두 장면을 통해 이 정서를 폭발적으로 터뜨리지요.

어떻게 보면 영화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데 미묘한 방해자와도 같은 이런 표현 수법은 마치 트릭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감독은 이런 줄타기를 아주 잘 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는 전체적으로 은근하며, 관객들에게 인상적인 여운을 줄 수 있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캐릭터와 그들의 심리적인 묘사에 대한 대목도 뛰어 나지요. 게다가 감정 과잉 없이, 절제를 잘한 점에 대해서도 후한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또한 배경으로 사용되는 영화 음악(피아노)은 매우 차분하고 감성적이며, 극 중 계절적 배경인 겨울과도 잘 어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러브 레터〉에 대해 그다지 우호적이지 못한 견해로 순정만화 같다는 지적이 존재합니다. 캐릭터 배치에 있어 운명론이 개입하고 있는 설정이나, 영화 전체적인 분위기 묘사에 있어서도 이런 느낌을 감지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특히 중학교 시절 에피소드 때 등장하는 사나에 캐릭터와 그가 보여 주는 개그는 전형적인 만화 캐릭터입니다.

하지만 이런 지적이 〈러브 레터〉의 가치를 절하하는 방향으로 사용된다면, 그것은 예술 장르 안에도 우열이 존재한다는 편견이라고 밖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와이 슈운지가 독특한 캐릭터 배치(멜로물에서는 드문)와 감각적인 영상, 그리고 분위기 있는 연출과 심리 묘사를 통해 수작을 만들어 냈다는 것은 분명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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