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대기업의 가훈 경영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03호 22면

삼성, 남의 의견 존중하는 ‘경청’
“정군(鄭君), 붓글씨로 쓸 글 좀 가져오게.” ‘기업제민(企業濟民)’ ‘고객제일(顧客第一)’ 등 사자성어로 붓글씨 쓰는 것을 즐긴 고(故) 이병철(1910~87·사진) 삼성 회장은 1980년대 초 어느 날 정준명 비서팀장에게 자녀에게 써 줄 글을 골라 오라고 시켰다. 정 팀장은 사자성어 30여 개를 골라 이 회장에게 올렸다. 이 회장은 그러나 마땅한 글이 없어서인지 당시 이건희 부회장에게 줄 붓글씨는 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경청(傾聽)’이라는 글을 써서 이 부회장에게 직접 건넸다. ‘내 생각을 말하기 전에 남의 말을 먼저 들으라’는 뜻의 경청은 이 회장의 삶의 지표였다. ‘경청’이 담긴 액자는 이 회장의 아들과 손자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을 거치며 삼성가의 가훈(家訓)으로 자리 잡았다.

이병철 회장은 기업 경영에서도 경청을 강조했다. 이 회장의 딸인 이명희 신세계 회장은 79년 36세의 나이에 아버지 바람에 따라 ‘현모양처의 꿈’을 접고 신세계 경영에 뛰어들었다. 첫 출근날 이 회장은 딸에게 몇 가지 지침을 줬다. ‘어린이의 말이라도 경청하라’ ‘사람을 나무 기르듯 길러라’…. 이명희 회장은 몇 년 전 신세계 사보에 기고한 글에서 “이 지침을 지금도 지키고 있다”고 밝혔다.

이병철 회장은 특히 전문가의 의견을 존중했다. 문제가 생기면 그 분야의 전문가를 초빙해 의견을 듣고 해결방안을 찾았다. 현장에서 제품을 생산하는 기술자도 수시로 회장실로 불렀다. 현장의 의견이 어떤 것인지 듣고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주변 사람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판단하는 가르침은 아들에게 큰 영향을 줬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직접 나서 이래라 저래라 하기보다는 큰 그림을 그려 놓고 귀 기울여 듣는 걸 좋아한다. 언론에 노출될 때도 말을 많이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핵심적인 말만 몇 마디 한다. 이 회장은 회의 때도 직원에게 “얘기해 봐라”고 한 다음 ‘왜’를 반복해 묻고 또 묻는다.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한 이 회장은 스스로 몰입하며 남의 말을 듣는 습관을 갖게 됐다고 한다.

이건희 회장의 장남인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도 경청의 자세를 마음에 새기고 다닌다고 한다. 국제행사 때도 일정이 바쁘지만 그는 말단 직원부터 고위 임원의 설명, 말 한마디에 귀 기울인다. 그는 바쁜 일정을 쪼개 미국·일본·유럽 등 전 세계 주요 고객사의 경영인과 수시로 교류하면서 이들의 의견을 듣는다. 단순히 인맥을 넓히려는 게 아니라 삼성의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다.

상대를 이해하고 존중해 주는 경청의 자세는 삼성의 기업문화가 됐다. 삼성에서 전문경영인이 소신을 갖고 일을 할 수 있는 체제가 갖춰진 것도 경청의 자세가 바탕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삼성에서 조직을 지원하는 부서가 강한 것도 ‘경청의 힘’이다.

경청의 문화가 녹아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삼성의 사장단협의회다. 매주 수요일 오전에 열리는 이 모임에는 삼성 계열사 사장 40여 명이 참석한다. 한 시간 남짓 열리는 사장단협의회에는 사내외 인사의 강연이 있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쁘다’는 삼성의 사장단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 내용은 무엇일까. 교수나 전문가가 참석해 역사·환경·국제정치·심리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강연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12월 15일에는 김명언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가 올림픽에서 동메달 선수가 은메달 선수보다 더 행복해한다는 ‘2등의 역설’을 통해 긍정의 힘을 강조했다. 은메달리스트가 동메달리스트보다 덜 행복감을 느끼는 이유는 세계 2등이라는 자부심에 대한 긍정성보다 금메달을 놓쳤다는 부정성이 더 강하기 때문이라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현대, ‘부지런하면 어려울 것이 없다’
현대그룹 창업주인 고 정주영(1915~2001·사진) 회장은 매일 오전 4시에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오전 5시면 서울 청운동 자택으로 자녀를 불러 함께 식사했다. 그의 자택에는 ‘일근천하무난사(一勤天下無難事·부지런하면 세상에 어려울 것이 없다)’라는 족자가 내걸려 있었다. 자녀가 아침식사에 늦기라도 하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른 아침식사로 자녀에게 근면과 성실함의 가풍을 일깨워 준 것이다. 정 회장은 생전에 “나는 새벽 일찍 일어난다. 왜 일찍 일어나느냐 하면 그날 할 일이 즐거워 기대와 흥분으로 마음이 설레기 때문이다”고 말할 정도로 부지런함을 강조했다.

이는 정 회장의 아들인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정 회장의 새벽 출근은 재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정 회장은 오전 6시30분이면 서울 양재동 본사에 출근한다. 그의 아들인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 사무실도 같은 시각에 불이 켜진다. 이 때문에 정 회장에게 업무보고를 하는 고위 임원은 오전 6시에는 출근하며 일반 직원도 대부분 오전 7시30분 이전에 출근해 하루를 시작한다.

정 회장은 활발한 현장경영을 펼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사무실에 앉아 있기보다는 국내외 ‘현장’을 찾아다닌다. 지난 3년간 20차례 이상 해외 공장을 방문했다. 예고 없이 계열사 등을 방문해 임직원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간부 직원이 현장 파악을 게을리하거나 품질 관리에 소홀하면 즉각 인사조치도 마다하지 않는다.

현대정공(지금의 현대모비스)에 있을 때는 건축 중이던 컨테이너공장 한쪽에 드럼통을 놓고 현장직원과 삼겹살을 같이 먹는가 하면, 공장 건설이 한창일 때는 텐트에서 직원과 동고동락하기도 했다. 정 회장의 현장경영 철학도 아버지의 가르침인 부지런함에 ‘하면 된다’는 현대 특유의 돌관정신(突貫精神·기운차게 어떤 일을 해 나가는 정신)이 합쳐져 만들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LG, 화합·신의 등 ‘10계의 덕목’
경남 진주시 지수면에는 구본무 LG그룹 회장 가문의 집성촌인 승산마을이 있다. 이곳에는 구 회장의 증조부를 추모하기 위한 사당 모춘당(慕春堂)이 있는데 10개의 기둥에는 구 회장의 고조부인 만회공이 내린 가훈이 가보로 걸려 있다. ‘10계의 덕목’이다. ‘검소함으로 집안을 다스리고 공경함으로 몸을 닦아라’ ‘형제간과 종족 사이에는 서로 좋아할 뿐 따지지 마라’ ‘작은 분을 참지 못하면 마침내 어긋나게 된다’ 등 상당수가 ‘가족 간의 인화(人和)’를 강조한다.
LG 창업주인 고 구인회(1907~69·사진) 회장은 10남매 가운데 맏이였다. 그는 한때 4대가 함께하는 대가족을 꾸려 나가면서 집안 어른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형제간 우애와 근면·성실을 강조했다. 이는 LG 기업 문화의 토대가 됐다.

지금도 집안에 새 며느리나 사위를 맞으면 이들이 이곳을 방문해 가풍을 익히도록 하고 있다. 10계의 덕목은 자손이 많은 구씨 가문이 큰 잡음 없이 단합하게 한 바탕이 됐다. 이런 가르침은 60년 이상 지속됐던 허씨 집안과의 동업 관계에서도 빛을 발했다. 2004년 LG와 GS는 무난하게 그룹을 분리했다. 구본무 회장이 평소에 강조하는 덕목도 약속과 신의다. 구 회장은 지난해 초 신임 임원에게 “경영자는 신의가 생명”이라며 “어떤 상황에서도 약속을 했으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SK, 지식과 실천의 중요성 가르쳐
“물통 안의 물이 많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물통을 크게 만들어 그 안에 언제든지 물을 가득 채울 수 있도록 움직이는 사람이 되라”고 최종현(1929~98·사진) SK 회장은 생전에 아들인 최태원 회장에게 수시로 말했다. ‘지식과 경쟁력을 갖추고 무엇이든 스스로 하라’는 가르침이다. 최태원 회장은 신입사원에게도 이 말을 종종 한다.최태원 회장은 아버지에게 세 가지의 큰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다. 우선 ‘지식을 쌓아라’였다. 최종현 회장은 “내가 물려주고 싶은 재산은 물적 재산이 아니라 지적 재산이다. 지식이 있으면 재물은 따라온다. 하나 지식 없이 재물만 있으면 그 재물은 오히려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말하곤 했다.

두 번째 가르침은 ‘스스로 해결하라’였다. 최태원 회장은 경영수업을 받고 있던 어느 날 고민이 있어 아버지를 찾아가 상의를 했다. 최종현 회장은 아들의 이야기를 다 듣기도 전에 “그건 네 문제구나. 네가 고민하고 네가 풀어라”라고 하며 다른 할 말이 없으면 나가 보라는 표정으로 아들을 쳐다봤다고 한다. 세 번째 가르침은 지식의 실천이다. 그는 지식을 실천, 즉 행동함으로써 자식에게 지식인의 모범을 보여 줬다고 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