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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곤 칼럼]대기업 이익만 대변해선 전경련 미래 없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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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호 30면

필자가 중·고교를 다니던 1970년대에는 학급 반장이라면 다들 알아줬다. 행실 바르고, 신망이 두터운 학생이라는 보증수표였다. 으레 될 만한 학생이 반장이 됐다. (가끔 치맛바람으로 되는 경우가 있었지만) 요새는 많이 달라졌다. 반장을 맡을 만한 실력 있는 학생들이 기피한다고 한다. ‘공부 때문에 시간이 없다’는 게 주된 이유다. 반장의 역할이나 존재감도 예전만 못하다.
반장 처지와 비슷한 게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 자리다. 예전 전경련 회장은 명실공히 재계를 대표했다. 61년 초대 회장은 이병철 삼성 창업주였다. 그 뒤 정주영 현대 창업주, 구자경 LG 명예회장, 최종현 SK 회장 등 당대의 거인들이 회장을 지냈다. 잡음이 없었다. 80년 국보위 시절, 정부는 정주영 전경련 회장의 임기가 끝나자 교체를 요구했다. 하지만 전경련은 기습적으로 회의를 열어 정 회장을 연임시켰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을 정면 돌파할 정도로 조직과 자리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전경련에 위기가 온 것은 외환위기 직후인 김우중 회장(98년 9월~99년 10월) 때였다. 김대중 정부는 논란이 된 ‘빅딜’(대기업 사업 맞교환)을 밀어붙였다. 전경련은 재계 창구 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기업이 상처를 입었다. 반도체 사업을 빼앗긴 LG의 아픔이 특히 컸다. 구본무 LG 회장은 지금까지 전경련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다.

더 곤혹스러운 것은 대우의 몰락이었다. 전경련 회장의 기업이 워크아웃에 들어갔으니 체면에 큰 금이 갔다. 당시 김 회장이 대우를 살리기 위해 전경련 회장직을 방패 삼고 있다는 의혹도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김 회장은 99년 10월 전경련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첫 번째 불명예 퇴진이었다. 전윤철 공정거래위원장은 “전경련이 오너 중심 체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몰아세웠다. 안팎에서 홍역을 치르면서 전경련 위상이 추락했다.

그 뒤 회장이 바뀔 때마다 진통이 따랐다. 자리를 맡을 만한 경영자들은 “그룹 경영에 전념해야 한다”며 손사래를 쳤다. 2003년 전문경영인인 손길승 SK 회장이 등을 떠밀리다시피 회장을 맡았다. 하지만 정치자금 문제에 연루돼 8개월 만에 불명예 퇴진했다. 2004년부터 3년간 회장을 맡은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은 재임 당시 아들과의 경영권 다툼으로 곤욕을 치렀다. 전경련의 위상은 더 추락했다. 국민은커녕 재계 내에서도 존경을 받지 못했다.

지난해 7월 조석래 효성 회장이 건강 문제로 전경련 회장직 사의를 표명했다. 이후 7개월째 후임을 못 찾고 있다. 정병철 전경련 상근부회장은 최근 “현재까지 의사를 타진해본 사람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유일하며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 최태원 SK 회장 등과는 아직 접촉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건희 회장은 지난해 7월 일찌감치 고사의 뜻을 내비쳤다. 삼성에서도 이를 거듭 확인했다.

그런데도 전경련은 ‘이건희 회장 카드’를 고집하면서 스스로 입지를 좁혀놓고 있다. 전경련 내부에선 “전경련 회장은 맡고 싶다고 맡을 수 있고, 맡기 싫다고 안 맡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며 자존심만 곧추세우고 있다. 새 회장을 찾겠다는 절박함이 정말 있기나 한 건지 모르겠다.
전경련을 바라보는 여론이 좋을 리 없다. 신문에는 ‘회장도 못 뽑는 전경련, 차라리 없애는 게 낫다’는 논조의 사설이나 칼럼이 실리곤 한다.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이런 주장은 속시원해 보이기는 하지만, 진정한 해결책은 아니다. 뭐든지 깨부수기는 쉬워도, 새로 만들기는 어려운 법이다. 그렇다고 계속 헤매다가는 정말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

전경련은 더 늦기 전에 새 역할을 찾아야 한다. 정경유착이 사라지고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대기업 이익만 대변해선 진보는 물론 보수 정권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민심을 얻기도 어렵다. 회장들이 앞장서서 ‘오너 사교 클럽’이라는 이미지부터 깨기 바란다. 차제에 조직도 정비할 필요가 있다. 전경련 조직은 갈수록 현실에 안주하며 관료화하고 있는 느낌이다. 한강의 기적을 일군 한국 기업 특유의 도전정신을 찾을 길이 없다.

전경련과 비슷한 성격의 일본 게이단렌(經團連)도 한때는 정치자금의 파이프라인이자 대기업의 로비 창구였다. 지금은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고령화 해법을 찾고, 지방경제 활성화 방안을 내놓는 싱크탱크로 거듭났다. 몸을 낮추고, 국민을 품어야 한다. 이게 전경련이 살 길이다. 그러면 회장을 하겠다는 경영자도 줄을 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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