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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세계화의 길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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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호 30면

한자(漢字)는 글자 모양이 서로 달라 구별되지만 발음이 같은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중국어에서는 발음이 같은 한자의 성조를 달리해 의미 변별 기능을 보완했다. 하지만 성조를 사용하지 않는 소리글자인 한국어에서 동일 발음의 한자들을 구별해 가르치기란 쉽지 않다. 특히 외국인을 가르칠 때는 더더욱 그렇다. 소리로만 한자어를 설명할 수 있다면 복잡한 여러 모양의 한자어를 쉽게 가르칠 수 있다.

우리말의 주요한 특색 가운데 하나는 바로 받침이다. 다음과 같은 한자어는 모두 ‘서녁 서(西)’라는 기본 원소에 받침을 붙여서 생성된 것이다. 저녁 석(夕), 먼저 선(先), 이룰 성(成), 세울 설(設), 불꽃 섬(閃), 저녁노을 섭(燮)이란 한자어에 서로 다른 받침이 붙어서 뜻을 구별하는 변별적인 기능을 갖고 있다.

이와 관련해 필자는 한글을 배우는 외국인들에게 독특한 설명 방식을 개발했다. 한자어 받침의 변별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순수 우리말에서 드러나는 받침의 기능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정박할 박(迫)과 선반 반(盤)에서 ㄱ받침과 ㄴ받침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ㄱ받침이 들어가면 ‘닻을 내려 깊숙하게 박는 것’을, ㄴ받침이 들어가면 배 선(船)의 경우처럼 ‘물에 떠 있는 것’을 나타낸다. 양성자음 ㄱ과 음성자음 ㄴ은 초성과 받침에 있어서 서로 반대되는 개념을 나타낸다.

외국인들은 항상 한글의 특징인 받침에 대하여 질문을 많이 한다. 예컨대 빗, 빚, 빛에서 받침이 다른 이유를 묻는다. 또한 밟다, 핥다, 맑다, 밝다에서 다른 받침을 붙이는 이유를 묻는다. 이에 대해 한국어 교사들은 논리적인 대답을 해주어야 한다. ‘발’과 ‘밟을 답(踏)’의 줄임말이 바로 ‘발+답=밟’이라는 식으로.

한글 세계화를 위해서는 한국어를 쉽게 가르칠 수 있는 교수법의 계발이 절실하다. 외국인들에게 어렵게만 느껴지는 한자문화권의 언어들에 대한 선입관을 바로잡고 한글이야말로 가장 쉽고 과학적인 언어라는 인식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 미국·중국과 중앙아시아 몇몇 나라의 대학에만 개설된 한국어학과를 중남미 각국에도 개설하게 도와줘야 한다.

얼마 전에 ‘미녀들의 수다’라는 TV프로그램에 출연한 어느 외국인이 ‘암탉’이라는 단어를 몰라 ‘치킨여자’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스페인어에서 남성·여성 명사가 구별되는 방법으로 ‘엘 니뇨(남자아이)’와 ‘라 니냐(여자아이)’처럼 남성형·여성형 어미를 사용하는 그들 언어의 습관이 한국어를 배울 때도 나타나는 것이다. 일본 음식은 이미 세계화가 된 반면, 비빔밥과 불고기 같은 한국 음식은 요즘에야 웰빙 음식으로 각광받고 있다. 한식 세계화를 위해 외국인들의 한국 음식 기호를 잘 파악해 그들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개발하는 것처럼 다른 나라 언어의 특성을 잘 파악해 한국어를 가르쳐야 한다.

외국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면서 인류가 국적을 뛰어넘어 공통 인식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예를 들면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은 ‘황소’에 비유되곤 한다. 힌두교에선 태양에 비유된 소를 숭배한다. 몽골어와 한국어는 어순이 같아 몽골인들은 한국어 어순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페루 인디언에게는 ‘고시레’라는 풍습이 있는데 잠잘 때 밑에 까는 ‘요’도 요라고 한다. 중남미 인디언들은 어쩌면 한국인이 같은 혈통의 몽골리안이라는 생각으로 한류 열풍을 받아들일지 모른다. 페루 청소년들은 한국 연예인에 대한 관심 때문에 한국어를 배운다고 한다. 한류 열풍을 잘 살리면 한글의 세계화는 생각보다 빠른 길을 갈 수 있다.



임규인 한국외국어대에서 영어·스페인어를 공부한 뒤 언어학 박사 학위를 땄다. 10여 년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멕시코 상사 주재원, 미주 민족학교 한국어 교사 등 다채로운 경력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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