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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종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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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신승철
큰사랑노인병원장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을 채 마치지 못하고 도시로 이사를 갔지만 그전까지는 강화도 교동이라는 작지 않은 섬마을에서 자랐다. 드넓은 농토 한가운데 옹기종기 초가집들이 모여 있고, 앞산 언덕 옆에는 교회당이 서 있고, 화계산 중턱에는 오래된 암자가 있었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가 가끔 새벽녘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두 손으로 빌면서 기도를 드렸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당시 이웃집엔 일찍 남편을 여읜 아주머니가 우리와 가깝게 지냈는데, 간혹 우리 어머니한테 교회에 가자며 권유했던 말도 들은 것 같다. 그때 어머니는 내색을 안 하고 그냥 고개를 끄덕이다 사양했다. 그러나 그러고도 이웃끼리 사이좋게 지냈다. 한번은 크리스마스 즈음인가, 호기심에 끌려 또래 아이들과 함께 교회에 들른 적이 있었다. 목사님 말씀이 무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근엄하고 진지한 자세만이 뚜렷이 각인되었다. 찬송가는 듣기에 좋았던 것 같다. 교회 밖으로 번져 나오는 찬송의 합창 소리가 저녁 하늘과 먼 바닷가로 은은하게 번져나가는 풍광이 가슴 시린 추억으로 남아 있다.

 어머니는 꼭 불교 신자라 할 수는 없지만 석가탄신일이나 백중날이면 가까운 그 암자를 찾아가 부처님 앞에 절을 올리곤 했다. 절에서 나오는 독경소리도 이제 와 회상해 보니 황해의 누런 바닷물 소리에 함께 섞여서, 아직도 아련한 평화의 노래소리쯤으로 내 잠재의식에 맴돌고 있음을 느낀다.

 반면 동네 어느 집에선 굿이나 푸닥거리가 심심치 않게 열렸다. 아마 집안의 누군가가 역병에 걸려 귀신을 내쫓으려고, 혹은 전쟁 때 돌아가신 백부의 혼백을 달래려는 살풀이였던 것이리라.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인가. 우리 집에서 아버지 사업 잘되게 비는 굿을 한판 크게 벌였던 적이 있었다. 학교교육을 받은 탓에 어린 마음에도 이게 미신임에 틀림없고, 그래서 남 보기에 부끄러웠다. 굿을 지켜보면서 두렵기도 했으나, 작두 타는 무당의 모습에서는 기이한 호기심도 일었다.

 성인이 돼서야 한 시대, 같은 문화를 함께 겪으며 살아지는 것이 모두 의미 있는, 좋은 경험인 것으로 비로소 자리매김하게 됐다. 미신이 됐건, 불교가 됐건, 기독교가 됐건 믿는 이의 마음에 어찌 기복의 심정이 없을 수 있겠는가. 기복을 극복한 온전한 마음을 얻을 수 있다면 더욱 더 좋은 일일 터이고…. 요즘은 그런 생각이다. 그뿐인가. 살펴보니 세상 모든 일이 결국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란 데까지 천착하고 있는 중이다. 요즘 일부 종교 지도자들이 사회적 현안을 정치 쟁점화해 곧잘 불을 붙이는 모습을 목도한다. 내 소박한 종교관으로 보자면 뭔가 집단적 이기심이나 과도한 자기우월증 심리가 개입되지 않았나 하는 우려가 든다. 영적 가치를 추구하는 종교의 본분상 사회 현안에 대해 지혜로운 메시지를 전하면 되는 것이지 극단적 행동화에는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다. 선형적 사고나 이분법적 논리라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사랑과 자비의 마음이 깃들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신승철 큰사랑노인병원장

◆약력=연세대 의대 졸. 연세대 의대 정신과 교수. 정신과·신경과 전문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