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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를 배워야 하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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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조순용
지상파DMB특별위원장

교수들은 2010년의 사자성어로 ‘장두노미(藏頭露尾 : 꼬리는 놔두고 머리만 감춘 꼴)’를 꼽은 데 이어 2011 희망을 담은 사자성어로는 ‘민귀군경(民貴君輕 : 백성은 귀하고 임금은 가볍다)’을 제시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올해의 사자성어로 ‘일기가성(一氣呵成 : 좋은 기회가 주어졌을 때 일을 단숨에 몰아쳐 해냄)’을, 오세훈 서울시장은 ‘시불가실(時不可失 : 한 번 지나간 좋은 때는 다시 오지 않는다)’을 골랐다.

 비단 연말·연초가 아니더라도 사자성어가 등장하곤 한다. 여야가 정쟁을 벌일 때에도 자신들의 입장을 잘 대변하면서 상대방에게는 적절한 압력이 가해지는 한자어를 찾아내 활용하기도 한다. 이처럼 한자어·사자성어가 지도층에 애용되는 이유는 간결하게 자신의 뜻을 표현할 수 있고, 보고 듣는 사람들에게는 해석의 맛을 느끼게 하는 압축성 때문이리라.

 한자는 의미와 사유의 세계로 이끄는 언어이자 도구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말, 즉 국어에서 사유와 관계되는 말 거의 전부가 한자어라는 것도 이를 방증하고 있다. 풍부한 사유의 바다는 창의의 세계를 연결하는 공간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한자와 한자어와 관련해 심각한 모순을 안고 있다. 대통령에서부터 재벌 총수, 교수, 정치 지도자들이 사자성어를 활용하고 있지만 후세를 위한 교육현장에서는 한자어의 모태인 한자가 외면당하고 있는 것이다.

 1971년 1월 1일부터 우리나라는 한자교육을 전면 폐지했다. 당시 한글전용이 곧 애국이라는 편협한 논리의 광풍이 몰아친 결과였다. 당시 서양화가 오지호 화백은 국어학논문집 ‘알파벳문명의 종언’을 출간한다. 그는 책 서문에서 ‘국어에 있어서 한자어란 외국어나 외래어 또는 차용어가 아니라 그것이 바로 국어라는 사실’을 먼저 지적했다. 사유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 태반이 한자어인데 그 모태인 한자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심각한 위기가 올 것이라고 설파했다.

 필자는 바로 그런 오 화백의 심상치 않은 외침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는 인터뷰 내내 이런 걱정을 했다. “한자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서 사유공간을 빼앗는 것이고 고등 사고를 할 능력을 배양시키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었다. ‘사고능력이 떨어지는, 즉 생각이 모자란 채 그들이 어른이 되는 사회’를 오 화백은 걱정했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오 화백의 예견이 현실화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는지 모른다. 요즘 젊은이들이 개념이 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상대방을 배려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특히 너무나 빨리 발전하고 있는 디지털시대, 시간과 공간이 엄청나게 압축돼 버린 좁은 세상에서는 특히 ‘배려’ 정신이 아무리 강조돼도 부족할 터인데 상황은 정반대가 아닌가. 지도자들이 사자성어라도 활용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 희망이 있다는 징조다. 지적 사치를 위한 것이거나 과시욕에서 출발했다는 오해를 받지 않으려면 지도자들은 당장 교육과정에서 한자교육을 부활시켜야 할 것이다.

조순용 지상파DMB특별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