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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희망을 만들어 가는 세 사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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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꿈 근육위축병 … 디자이너 접었지만 철학자 꿈 커졌어요

근육에 힘이 빠지는 장애를 극복하고 건국대 철학과에 특수교육 대상 전형으로 합격한 11학번 김민경씨(오른쪽)와 엄마 오미숙씨. 김씨의 꿈은 디자이너에서 철학자로 바뀌었다. [건국대 제공]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면 사람들은 다이어리에, 또 마음속에 한 해의 소망과 꿈을 새긴다. 어떤 이는 세계여행을, 또 어떤 이는 이직을 꿈꿀 것이다. 여기 남다른 꿈과 소망, 기도로 새해를 맞이하는 세 사람이 있다. 사지의 근육이 위축되는 희소병을 앓으면서도 긍정의 힘을 잃지 않고 11학번 철학도가 된 여학생, 미혼모를 돕는 공익카페를 이끌어 가면서 새해엔 미혼모에게도 희망이 깃들기를 소망하는 자원봉사자, 구제역으로 목숨을 끊은 신도를 떠나보낸 뒤, 구제역으로 고통받는 농민을 위해 기도하는 신부님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경기도 용인의 서원고 3학년에 재학 중인 김민경(20·여)씨는 요즘 꿈에 부풀어 있다. 근위축증 1급의 장애를 앓고 있는 그는 얼마 전 특수교육대상전형으로 수시 지원했던 건국대 철학과에 합격했다. 근위축증은 사지의 근육이 점점 위축되는 희귀병이다. 신체의 장애와 마음의 병을 이겨낸 그는 2011년 새내기 철학도가 된다. 입학을 앞두고 지난해 12월 29일 과 행사를 위해 건국대를 찾은 김씨는 “새 친구를 많이 사귀고, 같이 수업도 들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설렌다”고 말했다.

 김씨는 두 살 때 열감기를 심하게 앓은 뒤 근위축증에 걸렸다고 한다. 당시 진료를 맡은 의사는 “지금 상태로는 열두 살을 못 넘길 것”이라고 말했었다. 손발의 근육은 차츰 풀려갔다. 다리에 힘이 없으니 걷지 못하는 것은 물론 팔도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유모차를 타고 다니던 김씨는 남들보다 1년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김씨는 학교 수업을 마친 뒤 거의 매일 엄마 오미숙(52)씨와 병원을 찾아 재활 치료를 받았다. 한약도 달고 살았다. 그 결과 병약했던 몸은 차츰 기력을 되찾았다. 병도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얇은 전화번호부 한 장조차 찢을 힘이 없었던 팔은 한 번에 세 장까지 찢을 수 있게 됐다. 팔 힘이 조금씩 세지면서 김씨는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어요. 산업디자이너가 되어 휠체어를 예쁘게 디자인하면 참 좋겠다 생각했죠.”

 전과 비교해 팔 힘이 세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캔 뚜껑도 따지 못하는 팔로는 큰 화폭을 상대하기 어려웠다. 고2가 되던 해, 김씨는 결국 꿈을 포기해야 했다. 오랫동안 품어온 꿈을 잃고 방황하던 그는 고3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철학을 접하게 됐다. ‘그래, 내 어려운 상황을 존재의 문제로 승화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철학자라는 새 꿈을 선택했다.

 김씨의 몸은 남들과 달랐다. 하지만 불평보다는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늘 긍정적으로 행동하려 노력했다.

 “요즘도 마트에 가면 초등학생들이 날 보고 ‘장애인이다’라고 놀려요. 그럼 속으로 ‘그래. 나는 장애인이다’ 하고 웃어 넘기죠.”

 늦은 밤 함께 병원에 다녀온 엄마가 지쳐 있을 때도 “엄마. 운동해야지”라고 먼저 얘기를 건넨 것도 김씨였다.

 가족의 헌신적인 돌봄, 선생님의 따뜻한 배려는 김씨의 긍정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 됐다. 체육시간에 휠체어를 탄 김씨에게 “너도 나가서 함께하자”고 말해준 초등학교 1·2학년 때의 담임선생님. 그는 학교 측에 제안해 운동장에서 교실로 통하는 입구에 계단을 없애고 나무 판자를 설치하게끔 하기도 했다. 고교 때 만난 한 세계사 선생님은 병원을 가느라 수업에 빠진 김씨를 위해 전화로 1시간 가까이 수업을 해주기도 했다. 어머니 오씨는 딸의 체육시간에 학교를 찾아 딸이 최대한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사랑해주고, 새로운 멋진 꿈도 갖게 된 난 참 행복한 사람이에요. 새로운 꿈을 위해 2011년엔 성실한 예비 철학도가 될 거예요.”

활짝 웃는 김씨의 모습에 사랑과 희망이 엿보였다.

송지혜 기자

봉사 “미혼모들 홀로 설 때까지 …”

이순도(58·사진)씨의 2011년 소망은 “이 땅의 미혼모들이 당당하게 자립하는 것”이다. 미혼모 지원사업을 하는 공익카페 파구스(PAGUS·‘언덕’을 뜻하는 희랍어)의 사업단장인 그는 2일 자신의 이름처럼 ‘순도’ 100%인 봉사를 다짐했다.

 NGO인 월드휴먼브리지가 운영하는 카페 체인점 파구스는 올해부터 모든 수익금을 미혼모 지원사업에 사용하기로 했다. 이 단장은 2006년 경기도 분당에 파구스 1호점을 낼 때부터 이 사업을 담당했다. 지난해 12월 30일엔 서울 노량진2동에 4호점을 열었다.

 이 단장은 ‘돌청(돌아온 청년)’이다. 패스트푸드 가맹점을 운영하다 은퇴한 뒤 공익사업에 참가했다. 월급은 한 푼도 받지 않지만 자신의 수십 년 노하우를 쏟아 붓고 있다. 이 단장은 “일을 그만두고 쉴 나이에 새 일을 시작할 수 있어 감사하다”고 말했다. “성공해 돈 버는 게 목표가 아니라 좋은 일을 성공시키는 게 삶의 활력이 되니 일석이조”라며 웃었다.

 이 단장은 사업을 안착시키느라 주말에도 쉬지 않고 일한다. 양질의 커피와 빵을 저렴한 값에 팔고, 직접 직원들에게 친절교육을 시키면서 대형 체인 카페와 차별화했다. 그는 “자격증은 없지만 전문 바리스타(즉석에서 커피를 만들어 주는 사람) 수준”이라고 자랑했다. 1호점 월매출이 5000만원대에 이른다고 한다. 새로 개장한 4호점은 처음으로 카페 공간까지 기부받아 책임감이 더 커졌다.

 특히 지난해 8월부터 여성가족부와 함께 미혼모 지원사업인 ‘엔젤맘 프로젝트’를 하면서 수익금 전액을 미혼모 지원사업에 쓰기로 했다. 이 단장은 “우리나라가 경제대국이 됐지만 아직도 많은 아기가 해외에 입양되고 있다”며 “미혼모들이 자신 있게 아이를 키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건 우리 사회의 몫”이라고 했다. 카페 공간을 더 기부받으면 체인점을 더 늘릴 계획이다.

또 미혼모들이 머물 수 있는 쉼터, 이유식과 창업 지원 등도 계획하고 있다. 이 단장은 “올해는 고생한 미혼모들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한 해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효은 기자

기도  “선한 농민들 더 고통 안 받게”

황세진(36·사진) 신부의 새해 기도는 농민들을 위한 것이다. 인천시 강화군에 있는 대한성공회 냉정리 교회의 신부인 그는 “선한 농민들이 구제역 때문에 더 이상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 달여 전 경북 안동에서 시작된 구제역이 최근 강화에까지 상륙했기 때문이다. 황 신부는 지난해 4월 구제역의 공포를 직접 목격했다.

 “사제로서 적절치 않다”며 인터뷰를 고사하던 황 신부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는 농민들을 보면서 배우는 게 많다”고 했다. 지난해 강화군에는 유난히 일이 많았다. 냉해에 이은 구제역, 목함지뢰로 인한 공포, 태풍과 병충해까지. 걱정스러운 마음에 위로를 건네는 그에게 농민들은 “사람 사는 일이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지 어떻게 매일 좋겠어”라고 답했다고 한다.

 황 신부가 목회 활동을 하는 강화군 선원면 냉정리에서는 키우던 소 39마리를 묻은 한 가정이 몰락했다. 남편이 피우던 담배로 인해 집이 불에 타버렸고, 그의 부인은 다음 날 농수로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황 신부는 이 여성의 장례를 치렀다. 그는 “구제역이 사람까지 잡는 병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황 신부는 “묵묵히 견뎌내는 농민들의 아픈 가슴을 잘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황 신부는 “아침저녁으로 이름을 불러가며 먹이던 소를 잃었다. 도시에서 애완견을 가족으로 생각하듯 이곳에선 소가 가족인데…”라고 덧붙였다. 아마도 농민들은 소를 가슴에 묻었을 것이다. 뭔가 얹힌 것 같은 가슴에, 빚까지 떠안고 사는 농민들을 위해 황 신부는 기도한다. 그는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입니다”고 말했다. 이번 구제역은 다행히 냉정리를 덮치진 않았다. 구제역이 발생한 지 6개월이 지나면서 소를 다시 들여놓는 농가도 생기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 4월 부인을 잃은 남편도 냉정리에 살고 있다. 하지만 구제역이 확산되면서 주민들은 여전히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2일에도 황 신부는 이들을 위한 기도를 계속했다.

  정선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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