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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미래 준비 안 하면 세상은 기업의 식민지 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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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호 28면

⑤정부와 미래학

짐 데이터의 미래학 이야기

지구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정부는 200년도 더 된 세계관이나 기술론을 바탕으로 세워졌다. 18세기 말 서유럽과 북미가 농업사회였을 때의 철학·우주론·가치관을 건국이념과 근본조직의 틀로 활용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때 이후 기업과 가족·종교, 기타 다른 조직체들은 시대의 변화에 맞춰 변화해왔다. 하지만 유독 정부조직은 그 시절 수준으로 뒤떨어져 남아 있다.

미국 정부는 산업화 시대 이전에 설립됐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1787∼1789년 헌법을 만들기 위해 모였던 필라델피아는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지만, 인구 3만 명이 채 못 됐다. 뉴욕도 겨우 3만 명, 보스턴은 2만 명도 안 됐다. 미국 전체 인구는 300만 명이었고, 동부 13개 주에 띄엄띄엄 떨어져 살고 있었다.

그런 미국이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는 지역 간 커뮤니케이션이었다. 미합중국의 13개 주는 제대로 된 도로 체계나 교통·통신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다. 연방주의와 양원제·권력분립·선거인단 구성 등은 이런 물리적·지리적 도전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정치 체제는 첨단기술이 넘쳐나는 21세기에도 멀쩡하게 살아 있다.

미국과 달리 근대 일본 정부는 산업화가 진행되는 시기에 태어났다. 그러나 전통적인 일본 통치제도를 현대화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현대적 우주론과 기술론에 입각해서 일본 정부 제도를 재창설해 보려는 시도도 아직까지 없다. 일본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입헌주의에 입각한 낡은 산업화 이전의 가정들에 바탕을 둔 제도를 지금도 적용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헌법을 제정할 때도 기존 제도의 틀을 바꾸지는 않았다.

1990년 공산국가가 붕괴하면서 동유럽 국가를 포함한 여러 나라가 정부를 새로 설계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도 낡은 정부 형태가 별 생각 없이 적용됐다. 지금의 유럽도 마찬가지다. 유럽 연방은 헌법을 제정할 때 진화된 우주론과 기술론에 입각한 통치 구조를 창조해보려는 뚜렷한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

정부는 왜 변화하지 않을까. 19세기 후반 이후 미국·일본·독일·한국 등은 오직 하나의 미래를 위해 존재했다. 경제성장이다. 정부와 교육, 매스미디어와 가족, 그리고 심지어 종교까지도 성장을 거듭하는 국가와 경제를 따라잡을 국민을 양산해 내는 것이 목표였다. 끊임없이 성장하고 발전해 풍성해지는 그런 세계를 꿈꿨다.

한국은 경제성장을 지속하기 위해 앞서간 국가를 모방했다. 그들이 할 수 있다면 한국도 할 수 있었다. 경제발전에 관한 새로운 유행이나 선호가 생기면, 그것들을 따라 할 새 정책과 기관이 정부 안에 만들어졌다. 모방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겠지만, 특별히 어려운 통찰력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끊임없이 변화를 정확하게 짚어내는 능력만 있으면 됐다. 그러나 지금 그리고 앞으로 닥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새로운 정부가 필요하다.

1960년대에 들어 일부 학자는 사회적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정부가 미래를 조망하는 기관을 설립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프랑스의 베르트랑 드 주브넬은 ‘예측 공개토론위원회’란 공공기관 창설을 제안했다. 이를 통해 다방면의 전문가들이 미래를 예측하고 공개 토론하는 기반이 마련됐다. 또 노르웨이·오스트리아·이탈리아·스코틀랜드·헝가리·네덜란드·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소련 출신의 미래학자들은 정부가 미래에 대한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했다. 그들은 1965년 ‘인류 2000’이라는 연구조직을 만들었다. 이 조직은 세계미래학연맹(WFSF)의 모태가 된다.

이 즈음 미국의 앨빈 토플러는 ‘삶의 방식으로서의 미래’라는 글을 썼다. 이 글에서 토플러는 “사회의 변화 속도가 너무 빨라 사람들은 더 이상 현재가 아닌 미래에 살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베스트셀러인 미래의 충격(future shock)은 이 글을 토대로 쓴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미래지향적 민주주의(Anticipatory Democracy)라고 불리는 새로운 정부의 형태를 처음으로 제시했다.

이후 세계 몇몇 국가가 정부 조직 안에 미래를 연구하는 기관을 만들었다. 1970년대에 스웨덴은 총리실 산하에 미래사무국을 뒀다. 이 기관은 80년대에 정부에서 떨어져 나와 민간 싱크탱크의 역할을 하게 됐다. 네덜란드에서는 정부정책과학위원회가 정부에 최첨단 미래 정보들을 제공했다. 80년 뉴질랜드에서 국가미래위원회가 창설됐다.

영국은 사업혁신기술부 산하의 정부과학위원회에서 미래예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싱가포르 정부는 미래예측을 바탕으로 여러 미래에 관한 연구를 통합하고 있다. 93년 설립된 핀란드 의회의 미래상임위원회는 장기적인 문제점에 대한 정부의 제안을 평가하고 대안을 내놓는 활동을 벌이고 있다. 특히 핀란드 문화교육부는 92년 학술원의 지원을 받아 터쿠 대학에 미래연구센터를 설립했고, 17개의 핀란드 대학들은 다양한 미래 연구를 수행하면서 서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나는 이 글에서 한 가지 가정을 해보고 싶다. 만약 기업은 미래예측 활동을 하고 있는데, 정부는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우리는 새로운 기업 식민지의 위험 속에 살게 될 것이다. 공간이 아닌 시간의 식민지 말이다. 일반 대중과 정부 관료들의 미래 선택은 이미 기업의 관심이 허락하는 범위 내로 점점 좁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정부는 적어도 기업이 하는 수준만큼이라도 미래연구를 해야 한다. 더욱이 정부의 미래예측은 경제·과학·기술 혹은 국방안보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인권 등 보다 폭넓고 전반적인 문제를 다뤄야 한다.

늦지 않았다. 지금이 바로 모든 정부 조직에 ‘대안적 미래예측과 바람직한 미래 설계’라는 미래예측의 기능을 심어넣을 때다. 사실 제일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전면적으로 다시 계획하고, 정부를 다시 디자인하는 그런 환경이 조성된다면 더 좋겠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면 기존의 낡은 조직체 위에 단지 몇몇 효과적인 대안적 미래예측 부서를 첨가하는 것이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야 훨씬 나을 것이다.

번역=하와이 미래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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