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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지금 더 아름다운 이유, 심혜진

중앙일보

입력

피부색이나 혈통으로가 아닌, 사는 지역에 따라 인종을 나눌 수도 있다. 해양족· 고산족· 유목민· 농경민· 사막민 등이 그것인데, 이런 식으로 구분하자면 그는 단연 도시에 속하는 인종인 듯하다.

도시이되 "델리카트슨"류의 그로테스크한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도시가 아니라, 그가 지금 1백69cm, 33-25-36의 늘씬한 몸매로 시원스럽게 걷고 있는 도시는 건강하고 발랄하고 유쾌하며 합리와 개성과 멋과 세련과 낙관이 있는 도시다. 대리석이 깔린 긴 회랑을 반짝이는 에나멜 구두를 신고 걸어갈 때의 음향. 그가 걸을 때는 그런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최종회 시청률 45%을 자랑하는 〈마지막 전쟁〉

데뷔 이래 주로 스크린에서만 활동해 온 심혜진이 최근 화제를 모은 드라마 〈마지막 전쟁〉을 통해 모처럼 대중들에게 폭넓게 다가왔다.

최종회의 시청률이 무려 45%에 달했으니 근 2천만명에 달하는 시청자가 심혜진·강남길 커플의 극중 부부 스토리에 때로 통쾌해 하고 때로 안스러워 하며 때로 고개를 끄덕인 셈이다. 특히 이번 드라마는 같은 시간대의 타사 프로가 10대를 겨냥하며 화려한 배역과 스태프, 상당한 제작비를 들인 〈고스트〉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청률 전쟁에서 큰 격차로 승리했다는 점에서 더욱 이채를 띤다. 도대체 요즘 10대 취향과 싸워 이기는 프로가 있다니 신기할 정도다.

─ 드라마 끝난 소감은?
"시원섭섭. 쉴 수 있는 시간이 생겨 좋다."

─ 어떻게 쉬는가?
"남들처럼 여행 떠나고 싶지만 다른 스케줄 때문에 그렇게는 못하고 늘 그랬듯 혼자 사는 집에서 자면서 뒹굴, 먹으면서 뒹굴, 밀린 비디오와 책 보면서 뒹굴뒹굴하는 것이 가장 좋다. 우리 같은 직업은 뒤끝이 없고 단순해서 촬영할 때의 힘든 것을 금세 잊어버리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최대한 릴랙스시킨다. 20대에는 놀기도 좋아했는데 지금은 다음날 스케줄 때문에 몸이 피로할까봐 자제한다. 내가 나이를 먹어가나?"

─ 운동도 좋아하는 것으로 아는데?
"헬스·수영 포함해 매일 2시간 이상 땀을 흘려왔다. 최근에는 너무 바빠 여러 달 빼먹었지만. 곧 다시 시작할 것이다. 골프도 좋아한다. 핸디를 얘기할 수준은 못되지만 땅을 밟으면서 긴 코스를 걷는 느낌이 좋다. 뭐랄까, 아이들 샤워하고 나서의 뽀송뽀송한 감촉처럼 그렇게 맑아지고 즐거워진다."

★ 우연한 스카우트

─ 당신의 직업은 배우다. 어떤 직업인가?
"혼을 파는 직업이다. 그만큼 에너지 또는 기를 많이 소비하는 직업이다. 어쨌든 나의 몸으로 그리고 얼굴로 남의 인생을 대신 살면서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종합예술이다."

─ 어떻게 배우가 되었는가?
"우연히. 특별히 배우가 되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우연이라고 그가 말한다. 그 우연을 확인하자면 잠깐 그의 이력을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출생은 1967년. 그가 평범하다고 말하는 부모 밑에서 3녀1남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상군(尙君), 재미있는 이름이다. 공부에는 취미가 덜 했는지, 보성여고 졸업 후 대학 입시에서는 미역국을 먹었고 재수를 할지 전문대라도 갈지 망설이며 방황하던 중 그 모습을 안쓰러워한 큰 언니(명군·그와 외모가 아주 흡사하며, 이미 서울예전을 다니면서 광고 모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가 기분 전환이라도 하라고 명동의 미장원에 데리고 나갔다가 거기서 '우연히' 광고사진 작가의 눈에 띄어 사진을 찍혔다. 그렇게 시작한 광고모델 일은 제법 넉넉한 용돈이 정기적으로 생긴다는 것 외에 특별한 매력을 느끼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냥 때가 되면 나가서 아이스크림 광고도 찍고, 패션 광고도 찍고 하는 식이었다. 그러다 수틀리면 펑크를 내기도 했으니 상당히 아마추어적인 기분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모델로서 그가 뜨기 시작한 것은 CF 코카콜라에 발탁되면서부터이다. 88년에 제작된 이 CF는 '콜라같은 여자'라는 카피로 스물한살의 심혜진을 CF시장에 부각시켰고, 그 도회적이면서도 섹시한 이미지를 살린 광고에 주목한 영화판에서 출연 제의가 오기에 이르렀다. 모델 일조차 건성으로 다니면서 오래 할 생각이 없던 차에 찾아온 영화 출연 제의에 대한 그의 첫 대답은 "관심 없어요. NO!"였다. 이제나 저제나 그런 행운이 찾아오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수많은 스크린 지망생들이 들으면 대뜸 "미친…"했을 터이고, 그 비슷한 생각을 그의 어머니가 한 탓인지 "얘야, 상군아. 그래도 한번 해보면 좋지 않겠니?"하고 그를 차근차근 유혹(?)해 출연쪽으로 마음을 돌렸다.

그렇게 조연급으로 데뷔한 첫 영화가 지미필름의 〈추억의 이름으로〉였고, 뒤이은 〈물의 나라〉에서는 곧바로 주연으로 캐스팅됐다. 영화의 '영'자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한 연기인 까닭에 연기를 했다기보다 감독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던 수준이었지만, 최소한 영화 작업은 뜻밖에도 그의 기질과 아주 잘 맞아떨어졌다.

★ 배우임을 처음 알게 한 건 〈그들도 우리처럼〉

나름대로 영화 작업에 재미는 느꼈지만, 데뷔작 이래의 결과에 대해서는 그 스스로도 영 만족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연기는 물론이거니와 섹시한 이미지를 넘어 에로의 이미지에만 주목하는 감독들의 시선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죽하면 그가 출연한 영화를 극장에서 한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겠는가. 바로 그 무렵 박광수 감독이 〈그들도 우리처럼〉을 크랭크인하면서 그를 불렀다.

그에게 주어진 역은 탄광촌에서 티켓 파는 다방 레지 송영숙. 지긋지긋한 가난 때문에 왜곡된 성장과정을 겪었고, 그러면서 인생의 막장이라고 하는 탄광촌까지 흘러온 여인이었다. 성을 파는 역으로라면 그 무렵 그에게 들어오는 시나리오와 다를 바 없었으나, 여타의 작품이 성의 상품으로서의 그의 이미지에만 관심있던 것에 비해 〈그들도 우리처럼〉의 송영숙 역은 치열하고 엄숙한 삶의 리얼리티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달랐다. 그는 시나리오에 반했고, 그리고 배우로서의 전기를 맞을 것을 예감하며 촬영장에 뛰어들었다.

그 촬영장에서 박광수 감독의 그에 대한 연기 지도는 그야말로 초등학생을 대하는 듯했다.

"영숙이가 기영(문성근 분)의 자취방에 찾아가는데 왜 찾아가는가?"(박광수)
"…."(심혜진)
"영숙이가 여기서는 뛰는데 왜 뛰는가?"(박광수)
"…."(심혜진)

영화 속에서의 행동의 필연적인 이유를 추궁하는 박광수 감독 앞에서 심혜진은 겉으로는 한없이 작아지는 배우였지만, 그 과정을 겪으며 그의 배우의 내면은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었다.

〈그들도 우리처럼〉이 개봉되었을 때 그는 배우가 된 이래 처음으로 극장에 앉아 스크린에 비쳐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이제 정말 배우가 되었구나"하는 그때의 실감이 단순히 그만의 것은 아니었는지, 국내 개봉을 거쳐 낭트영화제에 출품된 그 작품으로 그는 일약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하는 대형 사건을 터뜨린다.

★ 여성MC로서도 최고 평가

활로로서의 모색이기에는 그는 여전히 스크린의 정점에 있지만, 어찌됐건 영화 일이 아닌, 방송 MC로서의 활동을 한 지도 제법 됐다. 특히 1년 남짓한 〈파워 인터뷰〉는 TV 인터뷰 프로의 새로운 시도로 좋은 반응을 얻어왔다.

─ MC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는 시선이 많이 생겼다. 또한 다방면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서 삶의 지혜를 많이 배웠다. 고마운 경험이다."

─ 어떤 지혜인가?
"평범하고 단순한 진리다. 말하자면 정말 노력했더니 결과가 얻어진다는 이야기다. 운이나 '빽'이라고 하는 것과 무관한, 단순하고 공평하고 정직한 원리가 삶을 지배한다는 것을 새삼 여러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 드라마가 끝난 현재 걸려 있는 활동은?
"파워인터뷰 MC는 이미 하고 있는 일이고 SBS 라디오에서 영화음악 프로의 진행이 예정되어 있다. 인체의 탐험을 테마로 한 TV프로의 MC도 얘기중이고…. 영화쪽에서는 왕가위 사단의 신작에 참여할 예정이다. 촬영은 아마 내년부터."

─ 영화쪽에서의 해외 진출을 위해서는 영어가 필수일 텐데?
"일상 회화는 조금 하는 편이다."(그는 조금이라고 말했지만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취미 반 공부 반으로 접한 그의 영어는 상당한 수준이라고 그의 매니저가 귀띔해 주었다)

그와 일로써 시간을 같이한 감독· 매니저는 한결같이 그를 두고 가장 일하기 편한 상대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웃음소리가 먼저 들려 그가 사무실에 온 것을 늘 알 수 있다고 말한 것은 그의 매니저이고 조명이나 촬영의 막내 졸병에게까지 먼저 "밥은 먹었어요?"라고 챙기면서 촬영장의 분위기를 은근히 가족적인 분위기로 만들어 가는 것도 그라고 귀띔해 준 것은 영화쪽 스태프들이다.

"연기는 내가 즐겁기 때문에 하는 일이다.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놀이가 나에게는 연기다. 그 일을 하면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먼저 마음을 열면 아무개씨라고 부르는 호칭들이 언니, 누나, 동생으로 바뀌어 간다. 그런 호칭 속에 일, 아니 놀이를 하면 훨씬 즐거울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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